누룩을 조심하라!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누룩을 조심하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43회 작성일 16-03-06 13:24

본문

누룩을 조심하라!

마16:5~12

2016. 3/6. 11:00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일명 ‘조류충돌’이라고 한다. 새가 비행기와 부딪히거나 비행기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고를 일으키는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새가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비행기와 부딪히면 비행기가 찌그러지고, 비행기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엔진이 멈추는 등 안전운항에 심각한 문제를 생긴다. 큰 비행기에 작은 새가 부딪히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1.8㎏ 무게의 새가 약 600㎞로 나는 비행기와 부딪히면 무려 40톤 무게의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몇 년 전(2009.1.15), 〈허드슨 강의 기적이란 기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다. 뉴욕에서 155명의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 4분 만에 엔진고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맨해튼의 빌딩숲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다행히 허드슨 강에 비상착륙을 성공하여 승객 모두가 무사히 구출되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9.11테러사건(2001년)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런데 이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새떼’였다.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 새들이 비행기 엔진으로 빨려 들어가 엔진이 멈추면서 사고가 난 것이다. 새가 비행기를 추락시킨 것이다. 실제로 항공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새떼라고 한다. 그래서 전투기나 민간 여객기 비행장마다 24시간 쉬지 않고 새 쫓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조류퇴치 담당자). 작은 실수가 큰 사고의 원인이 된다. 작은 불씨가 커다란 숲을 태우고, 사소한 말 한 마디가 큰 싸움을 일으킨다. 사소한 습관이 인생을 망치고, 작은 죄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세르비아계 청년의 총 한방에서 시작이 되었고, 1930년대 세계 경제 대공황도 미국 어느 시골 은행의 부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했다간 큰 코를 다친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점을 경계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는 두 종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경계하라고 주신 말씀이다. 특히 그들의 잘못된 신앙가르침을 누룩에 비유하셨다. 누룩은 가루를 부풀게 하고(확장시키고), 발효시키는(본질을 변하게 하는) 도구다. 성경에서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곳도 있다. 작은 누룩 덩어리가 밀가루를 부풀게 하고, 발효시킨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조용한 침투와 변화, 확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님은 누룩을 비유로 사용하셨다(마13:33). 누룩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의 사용이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누룩의 이와 같은 특징이 죄의 속성과 잘못된 교훈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주님은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그들의 교훈(신앙과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형식적인 외식주의’와 사두개인의 ‘현세적인 세속주의’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그 정신에는 관심이 없었다(예, 십일조, 안식일 준수). 특히 구제와 기도,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에 탁월한 열심을 보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했다. 그래서 결국 형식적인 외식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반면에 사두개인은 모세오경만 인정했는데, 그것도 철저하게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내세와 부활, 영적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이들은 바리새인과는 달리 헬라화나 현실정치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현세적인 세속주의자가 된 것이다.

 

경계해야 할 누룩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외식적인’ 바리새적 요소와 ‘세속적인’ 사두개적 요소가 겹쳐 나타나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국교회의 누룩으로 성장주의, 기복주의, 물량주의, 혼합주의 등 다양하게 말한다. 저는 이 시간 이런 것들보다는 우리 개인적인 차원에서 경계해야 할 누룩으로 ‘분주함’(바쁜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랍비 레비가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사내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보시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오?’ 하고 랍비가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뒤도 안 돌아보며 말했다. ‘행운을 잡으러 갑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가 말했다. ‘어리석은 자로구먼, 행운이 그대를 붙잡으려 뒤쫓고 있다구! 그런데 그대가 너무 빨리 가고 있어!’ 잘 생각해 보자! 행운을 붙잡으려다 행운으로부터 멀어진 이 사람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행복을 잡겠다면서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고, 주님의 복을 받겠다면서 복을 주시는 주님으로부터, 복의 통로인 교회와 예배생활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고, 가정과 가족을 위한다면서 가정과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쁘고 분주한 사람의 특징이다.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수많은 바이러스가 있다. 분주함은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악성 바이러스다.

 

현대인은 너무 바쁘고 분주하다. 이런 현대인을 가리켜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라고 한다. 밤낮없이 바쁘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제 자신과 주위 사람을 둘러봐도 그렇다. 목회자도, 직장인도, 사업하는 사람도, 가정주부도, 공부하는 학생도, 모두가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산다.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한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이 가족이란 뜻이다. 사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시대다. 다들 빼곡한 스케줄로 인해 함께 모여 밥을 먹을 여유가 없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런 바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바쁜 것에 대한 아무런 반성이나 성찰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바쁜 것을 성실과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바쁘지도 않으면서 ‘바쁜 척’(심리적 가면)하는 것이다. 사실 분주하고 바쁜 것과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은 다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은 한 곳에 집중하여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분주하고 바쁜 것은 여러 가지를 벌려놓고 마음이 바빠 안정을 취하지 못한 태도다(헬라어로 분주하다는 ‘페리에스파토’περιεσπάτο는 ‘사방에서 끌어당기다.’ ‘여기저기에 주의를 기울이다.’는 뜻). 뭔가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룬 것도 남는 것도 없다(전9:11). 결국 탈진(Burn out)하고 만다. 이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놓치면서도 너무 바쁘고, 너무 분주하다는 이유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바쁘(忙)면 마음(心)이 죽는(亡)다(忙=心+亡).

분주하고 바쁜 것은 심각한 마음의 병(病)이다. 마음을 잃게 하는 병이다. 소중한 것들을 잃게 만든다. 너무 바쁘고, 너무 분주하면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소홀하게 된다. 그래서 소중한 건강을 잃고, 소중한 가족을 잃고, 소중한 좋은 친구를 잃게 된다. 무엇보다도 너무 바빠서 지체들과 교제를 나눌 수가 없고, 너무 바빠서 몸된 교회를 섬길 수가 없다. 그러니 지체들과 교회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고, 또한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예배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말씀을 묵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쁘다보니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은혜의 소낙비가 내려야 영혼이 물댄 동산 같고,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되는데, 너무 분주하고 바빠서 주님과 단절되니 사막처럼 물이 흐르지 않는 시내(와디)처럼 심령이 메마르게 된다. 영성이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자 칼 융은 ‘분주함을 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악 자체’고 했다(헬라어로 ‘’πονηρος이란 단어가 ‘바쁘다’πονεω는 단어와 어근이 같음). 주님 없이 바쁜 것은 악한 것이다. 일상에 매여 주님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일에 쫓기고, 자기 생활에 쫓기고, 자기 생각에 쫓기며 사는 사람은 자신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지 못한다. 주님의 음성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오늘 본문이 좋은 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6,7/ 내용설명 생략).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다(8~11).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에만 분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게 된 것이다. 생활이 분주하고 바쁘면 마음도 분주하고 바쁘게 된다. 마음이 분주하고 바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제자들처럼 들어도 잘못 듣거나 왜곡해서 듣게 되는 것이다.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분주함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누룩이다.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잃게 만드는 누룩이다. 이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해답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분주하고 바쁜 일상을 이렇게 극복하셨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5:16). 물러가사.’ 물러난다는 것은 ‘자신을 철수한다.’는 뜻인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감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영적인 공간을 갖는다는 의미이다(마음의 골방을 갖는 것). 한적한 곳에서.’ 한적한 곳이란 ‘그 광야에서’란 뜻이다. 광야는 세상과 구별되는 고독의 장소다.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의지했던 것들을 내려놓게 하는 곳이다. 그리고 ③‘기도하시니라.’ 우리 영혼에 은혜의 소낙비가 내리도록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고,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확보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예배생활에 헌신해야 한다. 이것이 분주함의 누룩을 제거하는 비결이다. 그렇게 하려면 주님처럼 ‘물러나 한적한 곳으로’ 가야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4 / 25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