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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부르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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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036회 작성일 16-03-2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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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부르짖음

렘8:18~22

2016. 3/20. 11:00

눈물에는 힘이 있다.

사람의 눈물에는 ‘로이시닌게팔린’이란 화학물질이 있다고 한다. 아직 로이시닌게팔린이 정확하게 무슨 작용을 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눈물의 가치는 이것이 들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 뉴욕 타임즈는 하품을 하다가 흘리는 눈물, 배우가 연기를 하면서 흘리는 눈물, 마늘이나 양파를 까면서 흘리는 눈물, 분노의 눈물에는 로이시닌게팔린 성분이 없다고 했다. 반면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 불쌍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감동을 받거나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 등에서만 로이시닌게팔린이 검출되었다. 타임즈 기사는 ‘이 성분의 화학적 작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눈물만이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나아가 하늘을 감동케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고 끝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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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위대한 자취를 남긴 사람들을 보면 어떤 ‘감동적인’ 계기로 말미암아 삶의 방향이 바뀐 경우가 많다. 그것은 누군가의 감동적인 말 한 마디일 수도 있고, 우연찮게 보게 된 어떤 감동적인 장면이나 영상, 또는 경험하게 된 감동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사도바울). 그 중에서도 누군가의 ‘눈물’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눈물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경우가 많다. 어거스틴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가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는 마니교를 추종하면서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살았다. 이것을 본 어머니는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쉬지 않고 눈물의 기도드렸고, 그 결과 탕자 어거스틴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가 본 것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 자신을 위하여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가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와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로 우뚝 서게 한 것이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눈물에는 힘이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소생하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주님의 눈물에는 영혼을 살리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데, 고난주간을 포함한 사순절은 우리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눈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다. 그리고 고난주간은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르는 절기다. 매년 우리가 고난주간에 특별새벽예배를 드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눈물을 우리 마음에 새기면서 그 자취를 따르기 위함이다. 이번 고난주간특별새벽예배에도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다시 한 번 당부한다. 이 기간에 여러분이 주님 앞에 쏟은 눈물이 여러분 자신은 물론 가정과 자녀, 일터, 그리고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소생하여 잘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흘리는 우리의 눈물에도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도 눈물의 사람이 나온다. 그는 점점 무너져 내리는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9:1). 선지자 ‘예레미야’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18).

 

여기서부터 9:8절까지는 임박한 유다의 심판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가(哀歌)다. 장차 자기 백성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내다보면서 온 몸으로 슬퍼하고 있는 장면이다. 본 구절에서 선지자는 위로를 받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의 병이 깊어 슬프다고 외친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슬픈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백성이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했던 선지자다. 그는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되리라 경고를 하며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의 예언대로 바벨론이 침공하여 파괴시키고, 죽이고, 남은 사람은 포로로 잡아갔다. 포로로 잡혀간 그들이 부르짖었다. 물론 이 일이 지금 일어난 것은 아니다.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지금 미래의 그것을 보고, 듣고 있는 것이다. ‘심히 먼 땅’ 바벨론에서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19상) 라는 외침이었다. 이는 나라가 바벨론에게 점령을 당하고 자신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온 현실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탄식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무능해서 자신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이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19하) 그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뻔뻔스러움에 한없이 ‘슬퍼하고 근심하며 위로받을 길 없는 마음의 병’이 든 것이다. 사실 뻔뻔스러운 책임전가로 말하자면 우리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이다. 우리의 이런 모습 때문에 주님께서 피눈물을 쏟고 계심을 기억하자!

 

2.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 때문이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다. 그래서 심을 때 심지 않으면 추수 때 아무 것도 거둘 수가 없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구원의 때, 은혜의 때, 치료의 때가 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아무리 슬피 울며 애원해도 외면을 당하게 된다(마25:1~13). 실패한 사람들과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다음에’ 라는 단어다. 사실 ‘다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보장되지 않은 시간이다. 내일은 가장 노련한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이라는 말에 속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항상 ‘다음에’를 외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음에 만나자!’ ‘다음에 먹자!’ ‘다음에 하자!’ ‘다음에 하겠다!’ ‘다음에........’ 본문에서 유다백성도 그랬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 회복의 기회를 주셨지만 다 놓치고 결국 멸망하게 된 것을 두고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20).

 

대개 팔레스틴에서 곡물(밀과 보리)추수는 4~6월경에 한다. 이때 흉년이 들면 늦여름의 과실을 기대해야 하는데, 이것마저 수확하지 못하면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게 된다. 선지자는 현재 유다의 상황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여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구원의 기회를 다 놓치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멸망밖에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구원의 기회, 회개의 기회, 은혜를 기회를 놓치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자기 백성 때문에 선지자는 ‘슬퍼하고 근심하며 위로받을 길 없는 마음의 병’이 든 것이다.

 

길르앗으로 가자!

무지한 고집 때문에 구원의 기회, 회복의 기회, 부흥의 기회를 놓쳐버린 안타까운 상황을 선지자는 이렇게 반문하며 지적한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22).

 

길르앗은 요단동편에 있는 지역이다. 당시 그곳은 유향의 유명한 생산지였는데, 향나무 진액으로 만든 연고는 좋은 치료제였다(렘46:11, 51:8). 그곳에서 치료제인 연고가 많이 생산되니까 자연히 치료자인 훌륭한 의사도 많았다. 이 말씀은 가까운 곳에 치료약이 있고, 치료하는 의사도 많이 있는데, 유다백성이 그 치료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큰 은혜로써 허락해 주신 풍성한 기회를 지척에 두고도 놓치고만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 있고, 아무리 훌륭한 의사가 있은들 무슨 소용인가? 그 약을 사용하고,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아야만 효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좋은 치료약과 훌륭한 의사를 곁에 두고 죽은 사람처럼 현재 유다의 상황이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분문에서 강물처럼 쏟고 있는 선지자의 눈물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시는 주님의 눈물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 백성 때문에 마음이 병들었다고 탄식하는 선지자의 탄식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탄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 역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뻔뻔스러움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은혜의 기회들을 놓치고 있는 우리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특히 지금 우리에게도 가까운 곳 길르앗에 풍부하게 있는 유향과 의사처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온갖 좋은 기회들이 넘쳐나고 있다. 다양한 예배, 홈페이지, 여러 매체, 수많은 서적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너무 가까이, 정말 풍부하게 산재해 있다. 그런데도 우리 영혼은 사막처럼 황폐해지고, 심령은 바위처럼 굳어가고 있다. 식물신앙, 식물신자로 전락하고 있다. 유대 백성들처럼 가까이 두고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계신 것이다. 길르앗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상징하고, 교회에는 만병의 의원이신 주님과 만병통치약인 주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할 때 치료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금번 고난주간특별새벽예배를 통해 이런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되고, 새롭게 회복되고, 뜨겁게 부흥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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