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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65회 작성일 16-07-1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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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빛나게 하는 삶

딛2:11~14

2016. 7/17. 11:00

하나님께 실망한 사람들

우울증과 신경증에 시달리는 한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소년은 갑자기 화를 내며 벽장에 걸려있는 총을 꺼내 자기 아버지를 쏘아버렸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소년은 체포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어서 참을 수가 없어 죽였다고 했다. 그랬던 그였지만, 어느 날 그는 옥중에서 잘못했다고,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때늦은 후회를 하며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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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년처럼 신자들 중에도 하나님께 실망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신앙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책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필립 얀시가 쓴 「하나님께 대한 실망」이 그것이다. 저자는 여러 사람들과 상담을 통해 하나님께 실망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고, 이 상담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썼다. 어떤 사람은 무릎이 닳도록 기도를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실망하고,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온갖 봉사를 열심히 하고, 선한 일도 누구보다도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서 모른 척 하신다고, 어떤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해서 하나님께 호소했는데도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지 않았다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갖 요구와 규제를 강요하시면서 정작 자신이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시지 않았다고 실망했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 중에도 이런 경험이나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 실망을 하는 걸까?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 실망을 하는 걸까? 물론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신앙 때문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것이 문제다. 기도를 예로 들면, 기도는 하나님께 눈을 맞추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기도는 자신의 욕심과 만족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만 한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겠는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다 보니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잔뜩 기대를 품고 따랐는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거나 어긋나게 되니까 실망하여 돌아서는 것이다. 가룟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다. 절대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 모른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신앙, 절대 신뢰를 갖는 것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고, 알 수도 없지만 믿고 따르면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하나님의 가장 보배로운 소유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철저한 자기부정, 자기포기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 절대 신뢰다. 여기서부터 성도의 새로운 삶이 시작이 된다.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성도의 생활과 관련된 말씀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a people of His own)이 되게’ 하였다(14)고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이 구절에서 ‘특출한,’ ‘특별한’의 뜻을 가진 헬라어 ‘페리우시오스’(περιουσιος)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세굴라’(סגל)를 번역한 것인데, ‘개인이 소유하고 숨겨둔 특별한 보물’이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단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너무 귀해서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꼭꼭 숨겨서 간직하고 싶은 보석과 같은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감동적인 구절인데, 단어 하나 때문에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제와 조금 빗나간 이야기지만, 나는 이를 통해 사소함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다. 사소한 단어 하나가 문장에 생명력을 좌우한 것처럼 나의 사소한 말 한 마디, 작은 헌신, 작은 섬김, 작은 희생이 누군가에게,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하나님, 당신에게 실망했어요!’ 라는 생각이나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지가 불신을 낳고, 불신이 불평과 원망을 낳은 것이다.

 

보배로운 백성으로의 삶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여 자기 백성을 삼으신 것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선한 일에 열심을 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응답(반응)이다. 본문은 이것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먼저 소극적으로,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는’(12a) 것이다. 즉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에 대해 단호하게 ‘No!’(아니오!) 라고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하고 있다. 달리기 선수가 보다 잘 달리기 위해서 달리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한 것처럼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성도 역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버려야 한다.’(히12:1b)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성도는 ‘아니오’(No) 해야 할 경우에 눈알을 뽑고 손을 찍어내는 심정으로 단호하게 ‘아니오’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 나의 신앙을 썩게 하여 무너뜨리는 것들, 주님의 자녀다운 삶에 방해가 되는 것들, 사단에게 틈을 주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확실하고 분명하게 ‘아니오’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성도의 정체성, 즉 주님의 자녀다움, 주님 나라의 백성다움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서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이유이자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좋은 예다(내용설명을 생략). 많은 신자들이 사단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데 미적대며 미루는 사이 사단에게 점령당하고 만 것이다.

 

다음은 적극적으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12b) 살아야 한다. 앞의 내용이 버려야 할 것이라면 이것은 힘써야 할 것,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우리 삶의 세 영역을 의미한다. ‘신중함’은 개인적인(자신에 대한) 영역이고, ‘의로움’은 사회적인(다른 사람에 대한) 영역, 그리고 ‘경건함’은 신앙적인(하나님에 대한) 영역이다. 이는 성도가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비해야 할 덕목을 의미한 것이다. 성도는 자신에 대한 신중함, 이웃에 대한 올바름,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의 덕목을 가지고 현재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lives in this present age)는 것이다.

 

신중함에 대하여 잠시 말하자면, 신중함이란 단순히 ‘조심’만 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제어하고 조절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를 ‘self-control’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신중함은 물리적인 억압(제)이 아니라 조절이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맞게 분별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욕구나 감정을 억압하면 언젠가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다. 비상식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잠언은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라.’(25:11)고 하고 있는데, 경우에 합당한 말이 곧 말의 신중함을 의미한다. 말을 잘 조절하여 상황이나 분위기, 이치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영적으로 항상 깨어있어서 생각이나 말, 감정, 욕구, 행동에 신중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생각을 가지고, 합당한 말을 하고, 합당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합당하게 행동을 하고, 합당하게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힘써야 할 선한 일이고, 또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10) 하는 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교훈은 곧 복음이다. 복음을 빛나게 하는 생활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은 은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온 이야기다. 해설자가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를 어느 방으로 안내를 했다. 방의 한 벽면에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난로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다 물을 쏟아 붓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불이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성도가 이를 의아하게 여기자 해설자가 그를 난로가 놓인 벽의 뒤쪽으로 안내했다. 거기에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계속해서 난로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물을 부어도 난로의 불이 꺼지지 않고 도리어 활활 타오르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앞에서 물을 붓고 있는 이는 사단이고, 뒤에서 기름을 붓고 있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이 불은 은혜의 불이다. 이 불의 특징은 ‘꺼지지 않는, 소멸되지 않는 불’(unquenchable Fire)이다. 어떻게든 사단이 은혜의 불을 꺼버리려고 물을 쏟아 붓고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 계속 기름을 붓고 계시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이 은혜의 불 때문이다.

 

본문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과 함께 강조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11)다. 하나님의 은혜가 앞에서 소개한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자녀)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12). 영어성경(NIV)을 보면 이를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It teaches us to say ‘No’ to ungodliness and worldly passions, and to live self-controlled, upright and godly lives in this present age.).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에 합당하지 않는 것들을 거절해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에 합당한 것들을 살아내야 한다면 얼마나 어려울 텐데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므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절해야 할 것들은 다 거절하고, 힘써야 할 것들은 더욱 힘써서 보배로운 친 백성다운 삶을 살자! 그래서 하나님의 교훈, 곧 복음을 빛나게 하는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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