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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데서 기이한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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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924회 작성일 16-09-2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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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2:6~10

2016. 9/25. 11:00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

한 스님이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주막에 사람이 많아서 낯선 나그네와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나그네가 걸작이었다.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서 방 한 가운데서 큰 대자로 누워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잤다. 평소 조용한 산사에서 지내던 스님이라 밤새 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간밤에 잠을 설친 탓에 몹시 피곤했다. 여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나그네를 보니 괜히 화가 났다. 그래서 나그네의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리고 길을 떠났다. 나그네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는데, 왠지 머리가 서늘해서 만져보았더니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이 때 나그네가 자기 머리를 만지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있지?’ 이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을 풍자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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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꼭 물어야 할, 그래서 그 답을 꼭 확인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는 나는 ‘누구’(who)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무엇’(what)을 위한 존재인가? 여기서 ‘who’(누구)와 ‘what’(무엇)은 인생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문사다. 전자는 ‘정체성’(identity)에 해당되는 것이고, 후자는 ‘사명’(mission)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갖지 못하면 누구든지 인생을 방황하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 인생을 헤매게 된다. 또한 잘못된 정체성을 갖게 되면 비뚤진 인생,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비나 이단의 교주들이 대표적인 예다(「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도 같은 유의 사람).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가장 정확하고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것은 성경이다. 특히 본문은 이것을 잘 요약하고 있다.

 

성도의 정체성과 사명

본문은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 성도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

 

이것이 우리 성도의 정체성(존재와 신분)이고, 또한 사명이다.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성도는 주님의’(of the Lord) 사람,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러니 자기 방법(자기 생각이나 힘, 지혜, 경험)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by the Lord) 사는 사람,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과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나가가서 주님을 위하여’(for the Lord)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지난 설교(9월 4일)에서 정체성에 대해서 다루었으니까 오늘은 ‘사명’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b).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하고, 또한 신분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포해야 할 아름다운 덕이 무엇일까? 여기서 ‘’을 헬라어로 ‘아레타스’(ἀρετὰς)라고 하는데, ‘선함’, ‘미덕’, ‘영성’, ‘칭찬’, ‘탁월함’ 등의 여러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사역을 의미한다.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존재와 신분(정체성)을 변화시켜 주신 은혜로운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다(10). 이것을 다른 말로 ‘선교’, 혹은 ‘전도’라고 한다.

 

흔히 전도(선교)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한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전도에 있음을 밝혔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전도자로 삼으시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주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도 전도였다. 주님은 전도를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고, 이 뜻을 행하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라고 하셨다(요4:34). 또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전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 알 수 있다. 부활하신 다음 승천을 앞두고 유언처럼 하신 말씀도 전도에 대한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28:19a). 승천하시면서 선언하신 말씀도 전도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렇게 주님의 주된 관심사가 전도였다. 때문에 전도를 위대한 사명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존재의 이동, 신분의 이동,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장소의 이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명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는 것과 증인이 되는 것을 동의어로 생각했다.

 

믿는다는 것은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고,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여기서 그가 말한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은 ‘전도’(선교)다. 그래서 그는 전도를 ‘반드시 해야 할 일’(강한 사명감),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긴박감과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했다(고전9:16). 이는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가 그렇게 생각하고, 또한 그렇게 살았다(행4:19,20). 구제의 직책을 위해 선출된 예루살렘 교회 최초의 일곱 명의 집사들(행6:1~6)도 전도자가 되었다(행7: 스데반 집사, 행8: 빌립 집사). 이런 전통은 로마제국의 박해기간에 모든 성도에게로 이어졌다. 당시엔 주님을 믿는 순간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믿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굶어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전도자(증인)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영어로 ‘순교자’(martyr)란 말이 헬라어로 ‘증인’(μαρτυς)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들의 삶을 잘 반영하는 찬양이 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순례자의 노래」(pilgrim's song)

 

이러한 삶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믿는 것과 증인이 되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믿는 것은 곧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믿는 것과 증인이 되는 것(전도)을 분리한 것이다. 전도는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도라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인 전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희생해야 한다. 시간을 희생하고, 물질을 희생하고, 자존심을 희생하고, 내가 가진 그 무엇이라도 희생해야 한다. 희생하지 않고는 증인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희생을 원치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도를 하지 않으면 성도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에만 앉아있는 선수는 운동선수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이런 사람은 결국 선수생활을 포기하게 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복음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낼 때 성도로서의 정체성 또한 분명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

전도의 기쁨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다. 하나님이 이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모습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 성경은 전도를 통한 잃은 자의 회복이 곧 천국의 잔치임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찾는 기쁨의 잔치가 잃은 것보다 더 큰 것도 특징이다(눅15:). 우린 여기서 하나님의 관심과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과 같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고 하시고, 또한 이런 영광스러운 신분을 갖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를 통하여 큰 기쁨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이 바로 증인된 삶, 곧 전도자의 삶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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