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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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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549회 작성일 16-08-1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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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라!

막4:35~41

2016. 8/14. 11:00

폭풍 속에서

미국 플로리다 주에 제주도 크기의 오키초비(Okeechobee)라는 호수가 있다. 지난 1928년도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형 허리케인이 그곳을 강타했다. 호수근처에 찰스 시어스(Charles Sears)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노도와 같은 물결에 모든 것을 잃었다. 다행이 그의 네 가족은 고목나무에 의지하여 목숨은 부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물이 점점 불어나면서 목숨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한 아이는 그가 목에 태우고, 다른 아이는 그의 아내가 맡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나무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빠지면서 그만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 때 그의 아내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아이는 구출했지만 그에게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그 상황을 벗어날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아내에게 외쳤다. ‘여보! 나는 틀렸어. 나 때문에 힘쓰지 말고 당신과 아이들이나 잘 챙겨!’ 이런 그를 향해 아내가 소리쳤다.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세요.’ 그러면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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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

 

아내가 울부짖듯 이렇게 찬송을 부르자 자녀도 남편도 따라서 불렀다. 그들의 찬송은 폭풍우에 대한 두려움, 턱 밑까지 차오른 물에 대한 두려움, 무엇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찬송 소리는 어둠을 뚫고 멀리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기적처럼 구조 헬리콥터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조해주었다. 믿음의 중요성, 특히 찬송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어둠 속에서 드린 찬송이 구조 헬기를 부른 것이다.

 

그가 누구시기에

살면서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허리케인과 같은 폭풍우는 아닐지라도 우리 인생을 힘들게, 어렵게 하는 폭풍우는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자녀일 수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일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힘든 인생의 폭풍우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인생을 상징하는 갈릴리 바다에서 시련의 상징인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 싸우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하게 고요하게 하신 기적이다.

 

1.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분

주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여러 비유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해질녘에 배를 타고 거라사 지방으로 가시는 중에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누구보다도 갈릴리 바다를 잘 알고, 그곳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제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풍랑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모습, 그리고 산골 목수 출신 예수님께 풍랑을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모습이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는 그들이 만난 풍랑이 그들의 경험이나 기술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큰 풍랑이었음을 강조한다(37a).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고, 어부였다. 이런 풍랑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갈릴리 바다는 돌풍에 의한 풍랑이 자주 일어났고, 어부생활을 통해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쩔쩔맬 정도면 풍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공관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에 기록된 기적들의 특징이다(마가복음의 특징에 대한 설명). 이 사건도 그 중에 하나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를 하나님의 영역으로 생각했고, 풍랑이나 파도는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했다. 그러니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것이다. 바다와 바람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을 비롯하여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가?”(41) 라고 서로 말하며 크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풍랑을 해결해주시는 분이시다. 아니 인생의 모든 풍랑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그러니 풍랑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 알려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풍랑이든 해결을 받을 수가 있다.

 

2. 영혼을 목숨처럼 사랑하시는 분

그리고 마가복음 4장과 5장에서, 주님의 이동경로를 살펴보면 아주 감동적인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주님은 갈릴리 북쪽 가버나움에서 여러 비유(씨뿌리는 농부의 비유, 등불비유, 자라는 씨 비유, 겨자씨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다(4:). 본문에서 해질녘에 배를 타고 갈릴리 동쪽 거라사 지방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군대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서쪽으로 가셨다(5:). 이렇게 거센 풍랑과 싸우며 목숨을 걸고 건너가서 하신 일이 군대귀신에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이 전부였다. 그 사람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쇠사슬에 묶여 무덤 사이에 버려진 존재였다. 한 마디로 목숨을 걸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그를 고쳐주시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가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5:17). 환영받지도 못한 일을 위해 이렇게 목숨까지 건 것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 한 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나 같은 영혼을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찾아오셨다. 평생 비참한 생애를 사셨고, 결국은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모두가 거라사의 광인과 같은 나를 위해서 그러셨다. 세상에서 버림받아 소망 없는 나를 찾아서 풍랑을 뚫고 찾아오신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주님의 이러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온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한다 해도 주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 오셔서 그렇게 비참한 생애를 보내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그 답은 ‘’이다. 본문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풍랑은 왜 만나는가?

그렇다면 바다와 바람을 다스리시는 주님과 함께 있는데 왜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일까? 목숨을 걸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오신 사랑의 주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왜 풍랑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아니 왜 풍랑을 만나게 하신 것일까? 물론 바다에 풍랑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갈릴리 바다는 지형적인 특성으로 자주 돌풍이 일어났다. 우린 인생에 있어서 풍랑도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본문은 풍랑의 원인이 갈릴리 바다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일어난 자연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 마태복음(8:23~27)과 누가복음(8:22~25)에서도 취급하고 있는데, 이들과 비교를 해보면 분명해진다. 마가는 바다를 건너는 주체가 제자들이고 주님은 따라다니는 것 같은 뉘앙스를 주고 있다(

마태와 누가는 주님이 주체). ‘모시고 가매’(36)라는 단어가 이를 증거한다. 우리 성경은 완곡하고 정중하게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이는 헬라어로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γω)인데. ‘데리고 다니다.’는 뜻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즉 ‘주님을 필요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일이 없으시니까 주님께서 배의 ‘고물’(38)을 베고 주무시게 된 것이다(마태와 누가는 그냥 배 안에서 주무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마가는 구체적으로 장소를 지칭하고 있음). 여기서 고물은 배의 끝부분이고, ‘주무시다’(38)는 동사는 단순히 현재 잠자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잠자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황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제자들이 주인공이고, 주님은 할 일없이 구석에서 주무시고 있는 모습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 우리와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저자의 의도를 파악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해석이 어려운 것이고,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마태, 마가, 누가가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인데, 마태와 누가에선 생략된 것이 마가에만 있다는 것은 마가의 저자가 여기에 자신의 중요한 의도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가가 주님을 ‘제자들에게 끌려 다니시는 분’, ‘배의 고물(끝부분)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분’으로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왜 풍랑을 만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것은 주님이 머리가 되지 못하고, 주님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님이 주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주님을 이용하고, 주님보다 자신을 앞세워 주님을 주무시게 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머리가 되지 못하고, 주님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님이 주인이 되지 못하면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반드시 풍랑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절묘하게 믿음과 연결이 된다. 믿음은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권리를 주님께 양도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주님이 주인이 되시고, 주님이 머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고 책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머리로, 주인으로 섬기지 못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것이고, 또한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고 있고 주도하고 있는가?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주님, 풍랑을 뚫고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주님을 여러분의 머리로, 주인으로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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