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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풀어주신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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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420회 작성일 16-09-1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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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풀어주신 은혜

렘31:1~6

2016. 9/18. 11:00

바다에서 소중한 것

넓은 바다 한 가운데서 큰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다행히 선원들은 모두 안전하게 구명보트로 옮겨 탔다. 그런데 갑자기 구명보트에 있던 선원 한 사람이 가라앉고 있는 배의 선실로 다시 뛰어들었다. 배가 가라앉기 직전의 위험한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뛰어나와 다시 구명보트에 오른 그 선원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선장이 그 선원에게 퉁명스럽고 엄하게 말했다. ‘자네가 목숨 걸고 가져온 것을 보여주게. 도대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기에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 선원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가라앉고 있는 배로 가서 가지고 온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나침반이었다. 과연 그가 목숨을 걸만한 소중한 것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은 곧 생명이다. 나침반이 없으면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탈출을 했을지라도 방향을 모르니까 결국은 바다에서 표류하다 죽을 수밖에 없다. 다들 서둘러 배에서 빠져나오느라 그 소중한 나침반을 잊고 있었는데, 그 선원이 뒤늦게 기억하고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 그것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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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이 이와 같다. 점점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은 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이 나침반을 가져다주셨다. 그것이 죄악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복음의 말씀’이라는 나침반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는 여러 선지자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일을 하셨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했다. 본문의 저자 예레미야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회복해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서의 기본 메시지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유다의 배반과 불순종 때문에 임한다는 것이다. 본서는 크게 네 개의 주요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소명(1:), 유다에 대한 예언(2:~45:), 이방인에 대한 예언(46:~51:), 예루살렘의 함락(52:)이다. 본문은 두 번째 부분이다. 여기는 유다의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선언, 집행에 대한 말씀이 중심인데, 갑자기 매우 이래적인 내용이 나온다. 유다의 회복을 약속하는 ‘희망(구원)의 메시지’(30:~33:)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심판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역시 그 중에 하나다.

 

1절에서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약속이고,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표명이다. 그리고 이 약속의 성취는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실 때라고 하셨다(2). 그렇다면 까마득하게 먼 훗날에 될 일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 증거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고 다 알고 있는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고 있다(3). 옛 적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내셨던 것처럼 그렇게 그들을 바벨론에서 이끌어내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옛 적에’를 히브리어로 ‘메라호크’(מרחק)라고 하는데, 시간적으로는 ①‘옛 적에’, 공간적으로는 ②‘멀리 떨어진’이란 뜻이다. 둘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다. 시간적인 의미를 취하면 2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을, 3절은 ‘출애굽 사건’을 뜻하게 된다. 하지만 공간적인 의미를 취하면 2절은 ‘출애굽 사건’이고 3절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 된다. 나는 논리적 전개상 우리 성경의 번역(시간적 의미)이 더 합당하다고 여겨 이를 취한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두 개의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과 ‘인자함’이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쎄드’(חסד)인데, 구약에서 245회나 나타나고 있고 대부분 언약과 관련된 상황에서 쓰이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고난을 당하였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곧 ‘헤쎄드’가 그들을 이끌었던 것처럼,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무심히 버려두신 것처럼 보이는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도 하나님의 변치 않는 ‘헤쎄드’가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일을 하시게 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세 번의 ‘다시’(4,5)라는 부사를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 나아가서 교회와 성도의 사역을 잘 보여준다.

 

다시 세우리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라.......”(4a).

 

한 나라나 개인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사역이다. 주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범죄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무너뜨림과 파괴의 대상이 되지만 회개와 순종은 하나님의 헤쎄드에 의한 다시 세움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하나님의 행위다. 그리고 선지자나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되었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용이 예레미야의 소명에서도 드러나고 있다(1:10). 그래서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줄곧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무너뜨리심’에 대하여 선포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헤쎄드에 의한 ‘다시 세우심’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끌어내어 다시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다.

 

무너뜨림과 다시 세움은 둘 다 하나님의 방법이다. 여기서 ‘처녀 이스라엘아’(4)는 옛날의 순수성을 되찾은 상태를 지칭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말끔히 씻기어 순수한 처녀처럼 되었음을 뜻한다. 바벨론 포로라는 하나님의 무너뜨리심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정결한 처녀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너뜨려 낮추신 이유는 우리를 주님의 신부가 되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시 세우시기 위함이다. 사실 한 아이가 걷기 위해선 ‘넘어지다’와 ‘서다’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최소한 3천 번 이상 넘어져야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신앙생활도 수많은 무너짐, 부서짐, 깨어짐을 통하여 온전한 성도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다시’ 세움에 있다. 이것은 곧바로 성도와 교회의 사역으로 이어진다. 성도와 교회는 ‘세움이’가 되어야 한다.

 

다시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4b)

 

이 말씀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직후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이 홍해에 가로막혀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홍해 가운데로 길을 내셔서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다. 이 때 모세의 누나 미리암을 중심으로 여성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여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출15:). 본문은 바로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유다 백성도 참담한 일을 경험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영원하리라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까지 파괴되었다. 제사장들은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못난 왕이지만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짐승처럼 끌려가고, 백성들 또한 바벨론 곳곳에서 비참한 노예살이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가슴은 숯덩이가 되어 기쁨도 즐거움도 잃어버렸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의 기쁨, 해방의 즐거움을 허락하시겠다는 약속이다(4b).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 춤추게 하시겠다는 회복의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에 ‘빛을 뿌려주시고, 기쁨을 뿌려주시는 분’이시다(시97:11). 기쁨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13절을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현실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기쁘게 하고, 다시 즐겁게 하고, 다시 춤추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동시에 우리 성도와 교회가 절망적인 세상, 그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춤을 추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조사국 중에서 하위권에 속한다(37개 중에서 27번째).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빌 게이츠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꼽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압도적인 1위였다(49.3%).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대부분 행복한 나라의 국민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꼽았다(33.9%). 행복한 사람으로 ‘’를 많이 꼽은 사람들은 인도네시아(56.1%), 베트남(46.0%), 말레이시아(40.1%) 등 동남아 사람들이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특히 동남아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행복도가 가장 낮다는 것은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기쁨을 뿌려주시고,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렇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이다.

 

여기에는 기쁨의 사역, 행복의 사역을 우리 성도와 교회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 우선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하고, 주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자신이 기쁘고 즐겁지 않으니까 주변에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생각하면 짜증이 나고, 불쾌하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을 한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낮은 행복도에 우리가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세움이로 세우셨고, 세상을 춤추게 하는 기쁨이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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