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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헛된 일을 꾸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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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821회 작성일 16-09-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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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헛된 일을 꾸미는가?

시2:1~12

2016. 9/11. 11:00

High concept

아내가 남편에게 ‘어머님과 나,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굴 먼저 구할 거냐?’고 물었다. 남편은 아내의 농담에 ‘우리 어머니지!’ 하고 농담으로 답했다. 그러면 ‘다음엔 누구를 구할 거냐?’고 또 물었고, 남편은 ‘아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내는 ‘명색이 내가 당신 아낸데 나는 죽어도 좋단 말이냐!’고 했고, 남편은 ‘아내는 다시 맞이하면 되잖아!’ 하고 되받았다. 아내는 자신도 농담으로 시작한 말이었고, 남편도 농담으로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아내의 삶은 무기력해졌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외로움이 물려왔고, 자기 혼자 세상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급기야 아내는 우울증에 걸렸고, 병원을 찾아가 의사와 상담을 했다.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의사가 충고를 하나했다. ‘그럼 오늘부터 수영을 배우세요!’ 남편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헤엄을 쳐서 나오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아내의 우울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시각(관점)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같은 사건이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치와 평가가 달라진다. 시각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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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벌레의 시각’이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만 보는 현세적이고 근시안적인 시각이다. 다음은 말(馬)의 시각’이 있다. 말은 350°까지 넓게 볼 수 있지만 눈이 옆에 붙어있어서 정작 자신의 앞은 못 본다고 한다. 비본질적인 것에만 밝지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에는 어두운 시각이다. 끝으로 개구리의 시각’이 있다. 개구리는 모든 사물을 흑백으로만 본다. 다양하게, 깊게 보지 못하고 단지 흑과 백으로만 보는 이분법적인 시각이다. 이와 같은 근시안적이고, 비본질적이고, 이분법적인 시각을 극복해야 한다. 이런 좋지 않은 시각 때문에 우리의 삶도, 관계도, 세상도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Daniel H. Pink)는 그의 책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하이 컨셉’(High Concept)이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요즈음 많이 회자되는 ‘융합(통섭)의 능력’,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넓고 크게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뜻한다. 이런 시각을 가져야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글로벌 위기를 극복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잘살아낼 수 있다고 했다. 시각의 변화가 현재의 문제도, 미래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앙생활에서도 시각이 중요하다.

 

이 세상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아는가?

얼만 전, 영국전역에서 운행하는 버스 중 800대에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 말고, 당신의 인생을 즐겨라!’는 광고를 부착했다고 한다. 또 이런 광고가 붙은 버스가 유럽전역으로 확산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벌레의 시각, 말의 시각, 개구리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태도다. 본문에도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 세상의 군왕들과 그 관원들이 그들이다(2).

 

본문의 핵심은 ‘이 세상이 누구의 손에 있느냐?’ ‘누가 이 세상을 통치하느냐?’를 똑바로 알고 섬기라는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강대국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역사를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無爲而無不爲). 본문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절에서, ‘하늘에 계신 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사적 표현으로, 여기에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통치권, 특히 우주적인 통치권을 뜻하고(여기서 하늘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통치적 의미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전능성을 뜻한다.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손에 이 세상이 있고,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이 통치되고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성경전체의 핵심 메시지이고, 우리 신앙고백의 첫 번째 내용이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군왕들과 그 관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섬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자(이스라엘의 왕, 종말론적 메시야)를 대적하는 헛된 일을 꾸미게 된 것이다(1,2). 그들이 꾸미고 있는 ‘헛된 일’이 3절이다.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벌레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

세상의 군왕들과 그 관원들에게 하나님은 구속하는 쇠사슬이고, 얽어매는 오랏줄이었다. 자신들을 압제하는 폭군이고, 방해물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제거해야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자에 대한 그들의 시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지독한 압제자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벌레시각이다. 이 모두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시각,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분노하며, 벗어나고자 음모를 꾸민 것이다. 무신론 광고를 버스에 부착한 영국의 무신론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욕망대로 사는데 하나님의 존재가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워내려고 안달하는 것이다. 어쨌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와 같은 인간의 어리석은 태도에 엄중한 경고를 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으면 못할 짓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결과의 참담함은 성경(롬1:18~23)은 물론 1,2차 세계대전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없을까? 신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고, 예배와 섬김, 선교 등 하나님을 섬기는 일들을 멍에로, 얽어매는 오랏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즈음 헌금시간마다 ‘왜 그토록 부요하신 하나님이 이토록 가난한 나의 주머니를 넘보실까?’ 라고 생각하는 신자가 많다고 한다. 물질도, 시간도, 정성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멀리, 더 높이, 영원한 것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 벌레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해 자기 눈앞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는 현세적이고 근시안적인 눈만 가졌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높이 오르고, 좀 더 많이 가지고, 좀 더 즐길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비본질적인 말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존재, 섭리, 뜻, 능력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망령된 생각을 품게 되고, 헛된 일을 꾸미게 되는 것이다.

 

보아야 알게 된다.

여기서 ‘꾸미다.’(1b)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라고 한다. 이는 ①‘읊조리다.’ ②‘으르렁거리다.’ ③‘꾸민다.’ ④‘경영한다.’는 뜻이다. 같은 단어가 시1:2에도 나온다. ‘묵상’이란 단어가 그것이다. 같은 단어인데,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다.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사랑하고 좋아해서 밤낮으로 ‘말씀’을 하가(묵상)하고 있다. 그 목적은 ‘악인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기 위해서’(시1:1)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더 잘 순종하기 위해,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걷기 위해, 세상과 교제를 끊고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 더 많은 교제를 위해서 밤낮으로 말씀을 하가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께 더 구속을 당하고, 하나님께 더욱 결박되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기 위해서(11), 하나님께 더 철저히 복종하고(11,12a), 하나님께 피하기 위해서다(12b).

 

그런데 본문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그 관원들은 ‘헛된 일’을 하가하고 있다. ‘어찌하여’ 라는 의문사를 가장 먼저 오게 하여 그들이 하가를 하는 목적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의문사가 이끄는 문장은 ‘이유를 묻는 질문’(Warumfrage)이 아니라 ‘목적을 묻는 질문’(Wozufrage)이다.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거역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1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있는 복 있는 사람과는 달리, 본문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그 관원들은 가치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눈이 열린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그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지금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여 밤낮으로 중얼거리게 하는 것, 밤낮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밤낮으로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고, 기도이기를 바란다.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이기를 바란다. 꾸미고 있는 그 일이 어떻게 하면 주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될까? 어떻게 예배의 성공자가 되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될까? 어떻게 교회와 지체들에게 유익한 섬김의 사람이 될까? 이런 일들을 밤낮으로 꾸미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보는 만큼 알게 된다. 아는 것의 80%가 보는 것에 달렸다고 한다. 그러니 아는 것과 보는 것은 거의 같은 의미다. 일예로, 영어로 ‘알아요.’를 ‘I see’라고 말한다. 보고 있으니까 잘 안다는 뜻이다. 신앙생활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눈 바꾸는 훈련’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는 현세적이고 근시안적인 눈을 더 멀리, 더 높이, 영원한 것까지 볼 수 있는 눈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비본질적인 것만 보는 눈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만 보는 편협한 눈을 넓고 크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다. 그래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은 자를 대적하는 헛된 일을 꾸미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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