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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 ‘입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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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195회 작성일 21-12-0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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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 ‘

119:129~136

2021. 12/5. 11:00(대림절 둘째 주일, 성서주일)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구소련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목사가 기차 안에서 무신론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목사는 그에게 성경을 펴서 읽어주었지만 그는 성경을 빼앗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목사에게 낯선 방문자가 찾아왔다. 목사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그는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다. 목사는 그에게 어디서 왔고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기차에서 웬 물건이 하나 날아와 자기 앞에 떨어졌다. 그것은 성경책이었다. 그는 성경책을 집으로 가져와서 읽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기를 원했지만, 주변에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수소문한 끝에 목사님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성경은 몇 년 전, 어느 무신론자에게 빼앗겨 차창 밖으로 내던져진 바로 그 성경이었다. 무신론자가 화가 나서 내던진 그 성경이 예수를 알지 못한 한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고, 이런 역사하심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때라, 그 배는 대동강 하류에서 조선군사에 의해 불에 타고 말았다. 그 배 안에는 27살의 영국인 토마스(R. J. Thomas)라는 선교사가 타고 있었다. 배는 불에 타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도 대동강 모래사장으로 끌려와 참수형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형을 당할 때 여러 권의 성경을 주민에게 뿌려주었고, ‘야소! 야소!’ 라고 외치며 죽음을 맞이했다. ‘야소라는 말은 예수님을 말한다. 토마스 선교사를 목 베어 죽인 사람이 박춘권이란 사람이었는데, 토마스 선교사는 그에게도 성경을 한 권 건네주고 순교했다.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건네받은 그는 30년 후에 그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평양 최초의 널다리교회를 세우고, 영수(領袖)가 되어 남은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을 가져간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다. 12살 소년 최치량이다. 그는 박춘권보다 먼저 토마스 선교사에게 한문성경 3권을 건네받았는데, 성경이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겁이 나서 그것을 박영식에게 가져다주었다. 최치량으로부터 성경을 받은 박영식은 종이가 너무 좋아서 그냥 불태우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집으로 가져가 한 장 한 장 뜯어 벽지로 사용했다. 방안을 성경으로 온통 도배한 그는 도배한 그 성경을 무심결에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이 후에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는데, 이 널다리교회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다.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 3권을 건네받았던 최치량은 나중에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선교사가 순교하며 전해준 몇 권의 성경이 한국기독교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말씀에 입을 넓게 열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다. 능력이 있다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경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꿰뚫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은 그 말씀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좌절에서 일어서게 하고, 삶의 길을 밝게 비춰줌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성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으로 역사했다하물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고,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어찌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겠는가? 특히 오늘이 성서주일이기도 해서, 이 시간에 말씀을 향하여 입을 넓게 여는 것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편 119편은 8절씩 22개 문단(), 176절로 된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다. 주제는 한 마디로 말씀예찬으로 말씀을 율법, 율례, 규례, 계명, , 법도, 증거 등 다양한 단어로 표현을 하며 거의 모든 구절에 말씀과 관련된 단어가 들어있는 것이 특징이다(84,90,122,132절에만 없음). 또 한 가지 특징은 22개 각 문단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을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형식(아크로스틱)으로 된 시가 시편에 여러 편 있다(9,10,34,37,111,112,119,149). 본문은 히브리어 알파벳 17번째 문자 (פ)로 시작하는 문단으로, 주로 시인 자신과 말씀의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 주목할 점은 시인의 말씀에 대한 태도다. 말씀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132절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내가 입을 열고헐떡였나이다.여기서 내가 입을 열고는 히브리어로 파아르티(פָעַרְתִּי)인데, ‘입을 크게 벌리다.’는 뜻이다. 입을 크게 벌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모습이 아니다. 이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적어도 말씀에 대하여 입을 크게 벌린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는 말씀에 대한 간절함, 갈급함, 사모함 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헐떡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쉬아파(אֶשְׁאָפָה)기다리다.’, ‘갈망하다.’, ‘헐떡이다.’는 뜻이다. 이는 간절히 갈급하고 사모하는 모습을 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여기에 나온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는 표현만 다를 뿐 모두가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같은 의미의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여 말씀에 대한 시인의 강력한 내적 열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시인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했는지를 선명하게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입을 벌린 채 숨이 차서 헐떡거리거나 멀리 떨어진 개울물을 마시고 싶어 헐떡거리는 짐승처럼 그렇게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 것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듯이, 그의 전 생애는 말씀 주위를 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향하여 손을 들고, 작은 소리로 말씀을 읊조리게 된 것이다(47,48). 이것이 경건한 성도의 모습이다.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말씀에 대한 시인의 태도 중에 압권은 136절이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이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134)에 대한 시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시인은 사람들의 박해를 말씀에 대한 무지,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이해한 것 같다.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유대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시인도 말씀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렸다. 이 또한 말씀에 대한 시인의 열심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 그것도 자신을 박해한 사람까지 말씀에 대한 무지와 불순종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토마스 선교사가 자신을 참수하기 위해 벌렁벌렁 칼춤을 추는 망나니에게 성경을 건넨 것도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너무 말씀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 또한 말씀을 알기 원했기에 야소! 야소!’를 외치며 성경을 그에게 준 것이다. 이 모두가 말씀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궁핍(窮乏)한 시대를 위하여

흔히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공의 요소로 지능과 정보와 기술, 그리고 삶의 태도를 꼽는데, 이들 중에서 성공의 97%를 차지한 것이 삶의 태도라고 한다. 태도가 잘못되면 지능도 정보도 기술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신앙생활도 태도가 중요하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결국은 태도와 관련이 깊다. 기도를 예로 보더라도 기도의 내용보다 태도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간절함, 절박함, 절실함, 꾸준함 등 기도생활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단어들이다. 이 모든 단어는 태도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시대를 주리고 목마른 시대, 곧 궁핍한 시대라고 한다. 선지자 아모스의 말씀처럼 양식이 없고 물이 없어서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주리고 목마른 것이다(8:11). 여기서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실 지금 우리 시대는 말씀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만도 여러 가지고, 집집마다 몇 권씩의 성경을 소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여러 기독교방송 채널에서 쉴새없이 말씀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한 전염병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마다 유튜브 방송으로 설교를 송출하고 있어 말 그대로 말씀의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다. 그러니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 간절함, 갈급함이 없는 것을 뜻한다. 간절함이 없고 갈급함이 없으면 진수성찬도 무용지물인 것과 같다. 우리 손에 성경이 쥐어지도록 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렸고, 많은 학자들이 일생을 드려서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자주 하품을 하거나 산만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 간절함, 갈급함, 절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연애편지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편지다. 그러므로 말씀에 사로잡혀 살자. 말씀 때문에 우리 삶을 우리 맘대로 할 수 없음에 불편함이 있더라도, 말씀 때문에 우리 삶에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어 마음이 상할지라도, 말씀으로 우리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뼈가 떨리는 몸부림을 감당하더라도 말씀에 사로잡혀 살자.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더 읽고, 더 듣고, 더 배우고, 더 묵상하고, 더 실천하자. 이것이 없이 우리 인생을 고민하고 분투한들 그 결론이 세상의 결론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말씀에 목마른 우리, 말씀을 갈망하고 갈급한 우리가 되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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