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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怒)를 화(和)로 바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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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6-11-0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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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怒)를 화(和)로 바꾸는 사람

잠29:8

2026. 11/8 11:00(성령강림 후 스물네 번째 주일)

다리를 놓는 사람

영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웃 간의 사소한 오해와 감정 때문에 마을 전체가 둘 갈라져 싸우게 되었다. 서로를 향해 거친 말을 쏟아내고,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담을 높이 쌓아 올렸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목공소를 운영하는 ‘토마스’라는 노인은 어느 쪽도 편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물었다. ‘토마스, 이 마을이 갈라져 서로 싸우는데 당신은 화도 안 나오? 어느 편입니까? 어느 편이 되겠습니까?’ 토마스는 잠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더니,목공 연장을 들고 마을 어귀 부서진 다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 마을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다리 덕분에 서로 오가며 사이좋게 잘살 수 있었소.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서로를 향해 미움의 담을 쌓느라 다리를 다 부수고 있군요. 나는 끊어진 이 다리를 잇는 일을 하겠소.’ 그러자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그는 묵묵히 못을 펴고 나무를 다듬어 다리를 고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이렇게 시간이 지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토마스가 묵묵히 다리를 고치는 모습을 보며, 씩씩거리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싸우던 양쪽 진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연장을 가지고 토마스를 도와서 다리를 함께 고쳤고, 마침내 그 마을에 거짓말처럼 웃음과 평화가 되살아났다.

 

두 종류의 사람

우리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담을 높이 쌓아 주변과의 고립을 자초하는 사람과, 토마스처럼 다리를 고치고 만들어 서로 이어주는 사람이다. 분열과 다툼은 고립을 자초하는 담을 쌓는 일이고, 화해와 화목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를 고치고 만드는 일이다. 본문 역시 표현 방식만 다를 뿐 같은 말씀이다. ‘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8). 누군가의 거친 말 한마디,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혹은 오해와 편견 때문에 마음속에 화(怒)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갈등의 현장에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종류의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읍(공동체)을 요란하게 하는 거만한 자’와 ‘노를 그치게 하는 슬기로운 자’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혜가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거만한 사람

여기서 ‘거만한 자’(레침לֵצִים)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조롱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과신하고 과대평가하여 다른 사람의 말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는 교만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잠언에서 ‘거만한 자’는 주로 하나님의 지혜를 우습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대표적인 무리로 등장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만함은 인간관계의 파탄과 개인의 몰락을 부르는 가장 치명적인 결함으로 꼽힌다. 심리학에서는 거만함을 극심한 열등감이나 불안을 감추기 위한 ‘과잉 보상’(Overcompensation)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견디지 못해 과장된 가면을 쓴 것이다. 이를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고도 한다. 아는 것이 적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오만해진 것을 의미한다. 즉, 무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조금 알면서 전부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경청 부제’, ‘공감 능력 결여’, 그리고 ‘책임 회피’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이 대화를 독점하고(경청 부제),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공감 능력 결여), 문제의 책임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만 돌린다(책임 회피). 결국 이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떠나고 고립에 빠질 수밖에 없다(관계의 고립). 문제는 자신의 고립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만한 자의 언행은 주변 사람의 반발과 상처,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마치 작은 불씨가 큰 건물을 태우듯, 거만함은 갈등의 요란함으로 확산시키는 원인이 된다. 강력한 자기주장이 세워지는 순간, 소통의 문은 닫히고 대립의 담이 쌓인다. 자신의 존재감, 능력,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각인시키려 할 때 마찰이 생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꺾거나 누르고서라도 자신이 우위에 서겠다는 마음이 다툼의 불씨를 키우는 바람이 된다. 거만한 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래서 본문은 거만한 자를 ‘성읍(공동체)을 요란하게 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를 히브리어로 ‘야피후 키르야’(יָפִיחוּ קִרְיָה)라고 하는데, ‘성읍에 불을 지른다.’라는 뜻이다. 성읍 전체에 불을 지르듯 파괴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다.

 

슬기로운 사람

거만한 자가 강력한 자기주장과 과시로 갈등의 불을 지르는 사람이라면, 슬기로운 사람은 그 불길을 끄는 시원한 한 바가지 ‘물’과 같다.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여기서 ‘슬기로운 자’(하카밈חֲכָמִים)는 단순히 머리가 좋거나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의 회복과 화목을 만들어내는 영적·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뜻한다. 누군가 화를 내거나 자기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일 때, 똑같이 목소리를 높이면 공동체는 순식간에 요란해진다. 하지만 그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침묵하거나 부드러운 말로 대답하면 요란함은 금방 잠잠해진다. 슬기로운 사람이 이와 같다. 슬기로운 사람은 거만한 사람처럼 강력한 자기주장이나 자기과시가 아니라, ‘온유함과 유순함’을 무기로 삼는다. 그래서 관계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공동체의 요란함을 잠잠하게 만든다. 상대의 날카로운 말이나 분노를 그대로 받아치지 않고,부드러운 태도(‘온유함과 유순함’)로 그 감정의 날을 무뎌지게 만든다. 상대가 뱉은 말의 상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 불씨가 번지지 않도록 그 방향을 돌리거나 잠재우는(야쉬부 아프יָשִׁיבוּ אָף) 것이다.

 

노(怒)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통제되지 않은 노(분노)는 주변을 파괴한다(불이나 물처럼). 슬기로운 사람은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감정 이면에 있는 진짜 이유를 보거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율할 줄 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이 비로소 숨을 고르고 이성을 찾게 만든다. 소위 갈등의 중재자다. 다시 말해 거만한 자가 ‘갈등을 만드는 사람’(יָפִיחוּ קִרְיָה/Trouble Maker)이라면, 슬기로운 자는 갈등의 중재자로 ‘화평을 만드는 사람’(יָשִׁיבוּ אָף/Peace Maker)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세상은 불을 지르고,남의 탓을 하고, 갈등을 부추겨 공동체를 시끄럽게 만드는 ‘거만한 자’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찾으시는 사람은, 불길이 치솟는 현장에서 온유함과 유순함으로 분노의 불길을 끄고, 샬롬의 다리를 놓는 ‘슬기로운 사람’이다.

 

야쉬부 아프(יָשִׁיבוּ אָף)로 살아가기

감정적인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는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온유함과 유순함으로 분노의 기세를 꺾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다툼의 자리에 평화의 기름을 붓는 사람이 바로 슬기로운 자다. 이 슬기로운 사람의 완벽한 모범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성경은 우리 또한 주님처럼 되라고 하신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5:9). 누군가 분노할 때 같이 ‘불을 지펴’(יָפִיחוּ) 주변을 시끄럽게 만드는 거만한 사람이 아니라,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품고 다툼을 ‘그치게 하는’(יָשִׁיבוּ) 슬기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세상은 눈에는 눈,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도는 상대방의 거친 ‘분노’(אָף)를 유순함과 온유함으로 ‘잠재우는’(יָשִׁיבוּ) 평화의 중재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가정,일터, 교회, 만나는 모든 관계 속에서 날 선 감정 대신 ‘야쉬부’해야 한다. 분노를 그치게 하고, 사랑을 심어주는 귀한 은혜의 발걸음이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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