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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부른 소녀, ‘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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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259회 작성일 13-08-0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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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부른 소녀, ‘디나’

창34:1~7

2013. 8/4. 08:00, 11:00

사소한 것에 인생이 무너진다.

 창34장은 성경 전체에서도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 기록된 장이다. 강간을 비롯하여 분노, 속임수, 폭력, 신앙을 빙자한 집단살해, 약탈 등 끔찍한 내용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것도 본장의 특징이다. 그래서 본장은 ‘인간은 하나님이 없으면 못 할 짓이 없다.’는 어느 분(도스또예프스키의 「악령」)의 말처럼 하나님이 없는 세상,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사건이 야곱의 외동딸 디나의 외출에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이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이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낳은 것일까? 이 점이 우리에게 도전과 충격을 준다. 알고 보면 사실 모든 중요한 일, 심각한 사건들도 모두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에서 비롯된다. 사소한 것에 인생이 무너지는 법이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작은 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리고, 사소한 오해와 작은 불신이 관계를 무너뜨린다. 사소한 분노와 미움이 큰 싸움을 일으키고, 시기와 질투가 자신의 인생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무너뜨린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작은 불씨가 거대한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다. 특히 하나님이 없는 곳,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서 더욱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죄의 속성도 이와 같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 너무나 일상적인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파멸이다. 인류의 죄도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창3:). 그러면 어떻게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이 끔찍한 사건들의 배경이 된 디나의 사건을 통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틈을 주지마라.

물거미를 아는가? 말 그대로 물속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거미를 말한다. 물거미는 거미줄로 물속에 있는 나무뿌리나 물건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집을 만든다. 그리고는 물 위에 떠 있는 물방울을 물속으로 끌어들여 물방울 속에 있는 공기를 그 집에 채워 넣는다. 이 집을 공기주머니집이라고 한다. 마치 잠수정과 같다. 그래서 물거미는 그 속에서 먹이를 먹고, 허물벗기를 하고, 짝짓기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등 여유롭게 물속 생활을 한다. 이 물거미에게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물거미가 물속에서 살고 있지만 물에 속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신자도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거미가 물속에서 살지만 물이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하게 차단하고 산 것처럼 세속의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하고(엡6:11), 또한 끊임없이 물밖에 있는 공기를 주입해서 산 것처럼 은혜의 통로(말씀, 기도, 찬양, 예배 등)를 통하여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

 

사단은 바람과 같은 존재다. 작은 틈만 있어도 바람처럼 우리의 삶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거기에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작은 죄의 씨앗을 뿌려놓고 욕정의 물을 주고 분노의 거름을 주어서 그것을 자라게 한다. 바로 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창34장이다. 사단은 디나에게 침투하여 세겜의 빗나간 욕정으로 물을 주고, 야곱 아들들의 절제되지 못한 분노로 거름을 주어서 약탈과 살육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했다. 사단에게 틈을 주면 사단에게 붙잡히게 되고, 붙잡히면 치명적인 범죄의 도구가 된다. 디나 사건이 좋은 예다. 디나가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이 된 것은 그녀가 사단에 틈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가정과 주변에 비극을 부른 고통의 통로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비극을 부르는 사단의 통로(틈)를 차단할 수 있을까?

 

1.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

본문은 담담하게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1)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중요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그것은 ‘생각’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생각대로 반응한다. 그러므로 행동은 생각의 산물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생각이 없으면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도 없다. 의도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우발적인 행동도 역시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생각이 곧 그 사람이라’(잠23:7)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디나가 ‘그 땅(세겜)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는 것은 그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갖다가 결국은 그들을 보러간 것이다. 이것이 디나가 사단에게 틈을 제공하여 비극을 부른 고통의 통로가 된 첫 번째 원인이다.

 

생각은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터다. 생각을 지배하면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단이 가장 노리는 부분이 우리의 생각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독재정권이 들어서면 제일 먼저 언론매체를 장악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도 그의 생각이 사단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여기서 ‘생각을 넣었다’는 것은 유다의 마음에 생각을 심었다는 뜻인데, 달리 표현하면 생각이 이미 마귀에게 점령당했다는 뜻이다. 때문에 사단이 유다의 생각을 마음대로 조종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고 한 것이다. 땅에 것을 생각하면 반드시 사단에게 점령당하기 때문이고(엡5:27), 그 결국은 사망(롬8:6)이다. 디나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땅에 것의 상징인 세겜의 여자들에게, 그들의 생활과 문화에 그녀의 생각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 문제다. 바로 그 틈으로 사단이 디나에게 침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으로 틈타지 못하게 하려면 마음의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것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대로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위에 것만 생각하고, 위에 것만 찾는’ 것이다. 주님 나라와 의에 관심을 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주님의 부활과 영광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행하신 거룩한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주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생각을 사단으로부터 지키는 비결이다.

 

2. 그들과 사귀지 말라.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1)에서, ‘보러갔다’는 것은 단순히 세겜 여자들의 생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한 번 구경 간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 땅의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러 학자들이 디나의 외출을 ‘교제’(부시)와 ‘마을축제(종교행사)에의 참여’(요세푸스)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야곱의 가족이 그곳에서 상당기간(최소한 10년 이상) 머물렀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러갔다’는 것은 만나러 간 것이고, 교제하기 위해 간 것이고, 그들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그녀의 행동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웃에 살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문화다. 당시 가나안 문화에서 결혼하기 전 파티에서 만나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생활하고 있는 환경(장소)이 중요하고 문화(가치관)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디나가 이런 환경과 문화에 노출되어 이와 같은 불상사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디나가 사단에게 틈을 준 또 하나의 원인이다.

 

장소와 교제는 경건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1:1)고 했다. 악한 사람들과 장소를 공유하며 교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은 거룩한 장소(성전)를 사모하고, 그곳에서 경건한 무리와 함께하는 것(예배와 교제)을 사모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은 장소와 교제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소속감(내가 어디에 있느냐?)이 정체성(내가 누구나?)을 결정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어디에 있느냐?’(장소) ‘누구와 함께 있느냐?’(교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디나의 불행은 자신의 장막이 아니라 세겜성에 있었고, 가족과 함께 있지 않고 세겜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단의 표적이 된 것이고, 비극을 부른 고통의 통로가 된 것이다. 정말 우리가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는 승리하는 인생이 되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를 돌아보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사모해야 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있는 장소를 사모하고, 경건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사모해야 한다. 특히 주님 안에 있고,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

 

일상의 기적, 일상의 은혜

요즘 자동차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차가 없는 것은 목수에게 연장이 없는 것과 같고, 운전을 못하는 것은 자전거를 못타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런데 자동차가 여러모로 생활의 편리함을 주는 만큼 위험도 많이 따른다. 통계를 보니 우리가 아침에 집을 나와서 저녁에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확률이 75%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25%는 사고에 노출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하루 평균 14번 정도의 아찔한 순간을 만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하루는 기적의 연속이고, 은혜의 연속이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주님의 은혜인 샘이다. “나와 사망사이는 한 걸음 뿐”(삼상20:3)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정말 실감나는 세상이다. 그러니 매일의 안전을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고, 매일의 보호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님의 은혜로 25% 안에 포함되지 않고, 75% 안에 포함되어 하루하루 평안하게 보낼 수 있음이 정말 감사할 일이다. 더욱 감사한 것은 항상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도 그것들이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일로 확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폐암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머리가 아파서 진료를 받았더니 뇌종양이라고 판정을 사람이 있다. 사소한 시비로 넘어졌는데 뇌를 다쳐 평생불구로 사는 사람도 있다. 사소한 사건이 비극을 부른 고통의 통로가 된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서 디나 사건이 보여준 교훈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식당봉사를 하다가 넘어져 피가 흐를 정도로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병원으로 달려가 다친 부위에 이상이 없는지 진료를 받다가 뇌에서 작은 종양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치료를 받았다. 증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으면 치명적이 될 뻔 했는데 일찍 발견해서 완치한 것이다. 사소한 사건으로 더 큰 불행을 막은 것이다. 사소한 것이 크게 발전하지 않고, 사소한 것을 통해 심각한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복인가? 이것이 주님이 함께한 사람, 주님과 함께한 사람이 받는 복이다. 우리는 이 복을 받아서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의 사명은 이 복을 주변에 퍼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을 부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복을 부르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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