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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사람,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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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996회 작성일 13-09-2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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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사람, ‘모세’

출3:1~12

2013. 9/22. 08:00, 11:00

소명에 이끌리는 삶

 고든 맥도널드(G. MacDonald)는 현대인에게 두 가지 삶의 유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충동적인 삶, 혹은 ‘끌려 다니는 삶’(driven life)이다. 별로 의미 없는 일에 바쁘게 끌려 다니며 충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의 삶에서는 어떤 생산적인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삶의 가치관도 없고,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우선순위도 없다. 바쁘기는 무지하게 바쁜데 의미 없이 끌려 다니며 바쁘다. 충동적으로 살다보니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을 만나면 화내고 판단하고 상처주고 그러면서 자기도 상처를 받는다. 다른 하나는 ‘소명에 이끌리는 삶’(called life)이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고 생각하고 계획해서 그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비록 사소한 일이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이 맡기신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힘으로 살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일을 성취하는 삶을 산다.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에 긍지와 자부심이 강하고, 보람이 있다.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웃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같은 일을 해도 의미가 있고 생산적이다. 그래서 어떤 베스트셀러 작가는 ‘우리는 거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스스로 의미있게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일에 대해 소명을 주입시켜야 한다.’고 했다. 소명이 있어야 일을 신나게 재미있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신자는 소명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부르시는 것을 ‘소명’(calling)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소명(부르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사역에로의’ 부르심이 그것이다.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장면이다. 그래서 본문을 모세의 소명장이라고 한다. 본문의 이 사건이 곧 ‘사역에로의’ 부르심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군으로 사용하시려고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 물론 지금은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교회내의 직분을 비롯하여 일상생활 전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구약성서에서는 특정한 시대(상황), 특정한 사역을 위해 특정한 사람을 부르신 사건에만 국한시키고 있다. 본문의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세는 남은 생애 모두를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에만 정진하였다. 즉 평생 소명에 이끌리는 삶을 살았다. 이 시간 소명의 사람 모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불타는 떨기나무(burning bush), 하나님의 임재경험

성경에는 에녹을 비롯하여 노아, 아브라함, 여호수아, 사사들, 다윗, 엘리사, 이사야, 그리고 신약에서는 열두 사도와 사도바울, 디모데 등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부르심을 받은 시대(상황)나 사명, 방법은 각기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함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하고 있는 장면이다.

 

모세는 평상시와 같이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먹이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산중턱에 이르러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지금 그곳에 캐서린 수도원이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 한 다발의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사용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떨기나무라고 한다). 광야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었다. 떨기나무란 말이 나무지 불이 붙으면 금방 타버리는 덤불(bush)이다. 그런데 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데 나무가 타지도 않으면서 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이 신기해서 불 가까이 다가갔더니 불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모세야 모세야”(4)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가까이 오지 말고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니 발에서 신을 벗으라.’(5)고 하셨다. 그리고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7) 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8)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겠다.’(10)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여기에서 떨기나무(히브리어로 ‘스네’, ‘찌르다’는 뜻)와 같은 세상을 불사르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 떨기나무와 같은 사람에게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모세의 소명은 이렇게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경험에서 이뤄졌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셨다.

 

신을 벗으라(5). ‘자기발견

모세의 이름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세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말씀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에도 설 수 없는 부정하고 속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선 먼저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첫 번째 명령에서 모세는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되고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선지자 이사야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다음과 같이 탄식하며 외쳤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신발이란 활동의 주체인 발을 보호하는 도구이면서 인간적인 모든 활동의 상징이다. 본문에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지금까지의 삶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즉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나 경험, 지식은 물론 자기 고집이나 주장, 생각이나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신을 신으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간다. 아이들이 자기 신을 신기 시작하면 말을 듣지 않다. 신을 신지 않고 있을 때는 말을 잘 듣는데 신을 신으면 그때부터는 제 마음, 제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모세에게 이집트 왕자로서 보낸 40년은 자기라는 신을 신고 보낸 시간이고, 광야 40년은 그것을 벗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었다. 즉 자기 신을 신고 자기를 세우는데 40년이 걸렸고, 이것을 벗는데 40년이 걸렸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할지라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일을 맡기시지 않는다. 자기 열심이 열심이 아니고, 그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신을 벗어야 한다. 교만의 신, 절망의 신, 원망과 불평의 신, 오해의 신, 불순종의 신, 위선의 신, 자랑의 신, 탐욕의 신을 벗어야 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신을 벗고,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던 그 신을 벗어야 한다. 우리의 옛 생활을 모두 벗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이제 가라(9). ‘사명발견

이렇게 자신의 신을 벗고 맨발로 엎드린 모세에게 하나님은 두 번째 명령을 주셨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9,10).

 

이제 가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라.’ 이는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다. 40년 전에 그가 그토록 원했던, 그래서 살인까지 저지르게 했던 일을 이제야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이제야 자신의 사명, 곧 평생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 감격스러운 명령을 흔쾌히 받들지 못하고 거절했다(11).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설득하는 상황이 되었다(12). 이는 그만큼 그가 광야 40년을 보내면서 철저하게 낮아졌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더 크게, 더 위대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아무튼 낮춤만큼 쓰임을 받는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자신의 신을 벗은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고통과 절망의 땅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일이다(7,8).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이와 같다. 죄악의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고, 그들에게 영생의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이 사명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 사단에게 묶여있고, 가난과 질병에 묶여있고, 수많은 인생의 문제에 묶여있는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을 들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란다.

 

우린 모세의 이 소명에서, 자신감과 자부심이 충만하던 혈기왕성한 젊은 왕자시절엔 거절하시더니 자신감도 잃고, 자부심도 없고, 기력도 없는 늙은 목동시절에 사용하시겠다고 부르셔서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주의 일은 자기 열심이나 힘, 능력, 지혜, 세속적인 지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과 능력, 지혜로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상일에는 많은 인간적인 스펙이 요구되지만(실제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인간적인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단지 조건이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라!

한번 뿐인 인생이니 얼마나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잘 사는’(well-being) 것이 더 중요하다. 잘 사는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누구를 위해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한마디로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모세처럼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사실 신자라면 누구나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어 하고, 또한 경험해야만 한다. 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곳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할 일, 곧 자신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본문은 그곳을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정 장소를 강조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신(神)이시니 어느 곳에나 임재하실 수 있지만 이렇게 특정 장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정한 곳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곳 호렙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산 호렙은 어디일까? 바로 ‘교회’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중에 주님이 임하신다. 주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다(12).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예배를 사모하고, 항상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한다. 예배를 드려도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서 드려야 한다. 구경꾼이 아니라 제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길이고, 자신의 인생을 가장 의미있고, 보람되고, 아름답게 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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