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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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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283회 작성일 13-09-1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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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모세’

출2:15~22

2013. 9/15. 08:00, 11:00

광야대학 고생과

어느 신자가 자신은 지금 ‘광야대학 고생과’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사실 그 분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 모든 인생이 광야대학 고생과를 다니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실제로 광야를 경험하였다. 그 중에서 광야생활을 가장 오래 한 사람, 즉 광야대학을 가장 오래 다닌 사람은 모세다. 모세는 40세에 광야에 들어가서 죽을 때(120세)까지 80년을 광야에서 살았다. 그리고 광야대학에서 가장 성공적인 학생 또한 모세다. 챨스 스윈돌(Charles R. Swindoll)은 모세는 이 광야대학을 통해 4가지 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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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무명박사. 이제까지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쫓기는 도망자였고, 오직 사막의 짐승과 양떼가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둘째, 시간박사. 모세는 광야에서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참고 기다리는 지혜를 배웠다. 조급해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셋째, 고독박사. 모세는 광야에서 침묵의 고요와 고독의 깊이를 배웠다. 분주함이 아닌 묵상의 능력을 배웠다. 광야는 이를 가르치는 최적의 장소다.

넷째, 불편박사. 광야는 결핍의 장소다. 불편을 감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광야다. 모세는 철저히 하나님의 공급하심에만 의존하면서 모든 불편을 감수했다.

 

광야를 주신 이유

모세는 뜻하지 않는 사건에 휘말려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들어가 정처없는 도피생활을 하였다. 다행히 그곳에서 좋은 후원자(이드로)를 만나 그의 딸(십보라)과 결혼하여 자녀(게르솜)를 낳고 그의 양을 치며 살았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살인자에게 살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살인자를 민족의 구원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참으로 놀랍다. 본문은 그의 광야생활을 이렇게 단조롭고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 기간은 40년이다. 이 기간에 그는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참지 못하는 조급한 사람에서 ‘묵묵히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 좌우만 살피는 사람에서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사람이 되었다. 이집트의 왕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민족의 구원자가 된 것이다.

 

광야생활이 그의 삶에 이런 변화를 가져온 사실을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8장에서 자신의 경험에 비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광야를 허락하신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건너게 하신 목적을 ‘마침내 복을 주려하심이라.’(8:16)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이니라.”(신8:2~3).

 

1. 낮추심

40세까지 모세는 이집트 왕자로 살면서 이집트의 모든 학문을 연마하여 ‘그의 말과 하는 일들’(행7:22)에 탁월했다. 당시 그는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강한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그래서 혈기로 이집트의 감독관을 죽였고 동족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피한 도망자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40년을 이름없는 목자로 살았다. 그곳에서는 지난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배운 모든 것이(everything) 아무 것도(nothing)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 ‘아무 것도’ 할 없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집트 생활은 물론 자신감과 자부심도 철저하게 무너졌다(3:11, 4:1,10). 그에게서 더 이상 이집트 왕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집트 감독관을 단숨에 때려눕혔던 의분도 혈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통받고 있는 자기 동족을 돌아보고자 하는 의욕도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사실이다. 빈 항아리여야 그 안에 무엇이든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광야 40년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편리하도록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시간이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훈련 중의 하나가 ‘낮아짐’(겸손)이다. 광야는 낮아지게 하는 겸손 훈련소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낮추기 위함’(2)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주님께서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실패의 광야, 질병의 광야, 시험의 광야, 시련의 광야를 건너게 하심은 우리를 낮추시기 위함이다. 낮아져야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낮아져야 주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시험

헬라어에 ‘시험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페이라조’(πειραζω)와 ‘도키마조’(δοκιμαζω)가 있다. 성경에서는 이 두 단어를 혼용(混用)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페이라조는 유혹(temptation)을 목적으로 세상과 마귀로부터 온 시험을 뜻하고, 도키마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험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키마조(시험)는 알아보고’(test), 확증하기’(prove) 위함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검증’하는 과정이 시험인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도 진실 여부와 자격,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 검증절차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 ‘믿음의 검증’은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광야, 곧 시험이 필요한 것이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가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2).

 

그러니 시험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알아보고 싶고 확증하고 싶어 시험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확증해 보이는 기회이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고 권면한 것이다. 모세는 ‘크고 두려운 광야’(신1:19)의 시험을 통해 이와 같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확증하였다. 그래서 민족의 구원자로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3. 주리게 하심

주리다’는 말에는 ‘배고프다, 궁핍하다.’는 뜻과 함께 ‘갈망하다. 갈망하여 찾다’는 뜻도 있다. 배가 고프면 먹을 음식을 갈망하고, 목이 마르면 마실 물을 갈망하여 찾는다. 피곤하면 쉴 곳을 찾고, 외로우면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 어렵고 힘들면 도울 사람을 찾고, 불안하면 편안한 안식처를 갈망하여 찾는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결핍’은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갈망하여 찾게’ 한다.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결핍(부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반면에 삶을 역동적으로 살게 하는 비결은 결핍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결핍을 깨닫는 순간 행동하게 되어 있다(多讀王 김득신).

 

광야는 결핍의 장소다.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편안히 쉴 수 있는 집도, 자신의 생명과 가족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안전장치도, 길도, 그늘도 없는 곳이 광야다. 그저 메마른 모래와 흙과 바위만 있고, 태양이 그것들을 달구며 종일토록 이글대는 곳이다. 물론 그곳에도 생명들이 있다. 전갈과 뱀, 여우, 늑대와 같은 짐승들, 그리고 식물도 간간히 있다. 하지만 이 모두는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만큼 맹독을 지닌 위험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곳을 건너게 하셨다. 그 이유는 ‘결핍’을 경험토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들의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3). 이것은 자연스럽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갈망하여 찾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모세 자신의 뼈저린 체험에서 비롯된 교훈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결핍의 장소다. 이 결핍을 깨닫게 하는 장소다. 그래서 갈망하여 찾게 하는 장소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광야를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결핍 덩어리인지 알게 하여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여 찾게 하기 위해서다.

 

깨달아야 복이 된다(雖多誦經 不解何益).

실패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실패를 통하여 아무런 교훈을 깨닫지 못한 것이 비극이다. 마찬가지로 광야 자체는 비극이 아니다. 인생의 광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이 비극이다. ‘수다송경 불해하익’(雖多誦經 不解何益)이라고 했다. 비록 많은 경전을 외워도 그 뜻을 모르면 유익이 없다는 말이다. 보석도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겐 한갓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눈물도 그 의미를 깨달은 사람에겐 영롱한 보석이 된다. 폴 틸리히(P. Tillich)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광야를 허락하심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야 우리에게 주어진 광야가 비극이 아니라 축복이 되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과 자기 백성이 경험한 크고 두려운 광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백성들이 이를 알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에 비춰서 교훈하였다. 광야는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곳이고, 광야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사랑을 확증하는 곳이다. 또한 광야는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여 찾게 하려고 우리의 결핍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광야에 직면해 있는가? 그리고 그 광야가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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