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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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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894회 작성일 13-11-1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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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축제

신16:13~17

2013. 11/17. 08:00, 11:00(추수감사주일)

아버지의 유언

 소 11마리가 전부인 늙은 아버지와 아들 삼 형제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동안 키워온 소를 아들 3형제에게 다음과 같이 나눠 갖도록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다. ‘11마리 중에서 첫째는 1/2, 둘째는 1/4, 그리고 막내는 1/6씩 나눠가지도록 해라.’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대로 소를 나누려고 하니 나눌 수가 없었다. 11마리의 1/2은 5.5마리, 1/4은 2.7마리, 1/6은 1.8마리였다. 소를 죽이지 않고는 나눌 방법이 없었다.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은 이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재산분배가 어렵게 되자 고심에 고심을 하다가 지혜로운 이웃집 할아버지께 도움을 구했다. 잠시 생각하던 할아버지는 자기 집의 소를 선뜻 한 마리 내주면서 ‘이 소를 보태서 한 번 나누어 보라.’고 했다. 3형제는 11마리에서 1마리를 보탠 12마리를 가지고 나누었다. 12마리의 1/2은 6마리, 1/4분은 3마리, 1/6분은 2마리로 쉽게 나눠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원래 각자에게 할당된 몫보다 더 많이 받고도 한 마리가 남았다. 즉 첫째는 5.5→6, 둘째는 2.7→3, 막내는 1.7→2마리를 받았다. 그런데 그 합은 11마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남은 한 마리의 소를 다시 할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이웃 할아버지의 나눔이 삼형제가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의 유언을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나눠주었던 것을 다시 돌려받았다. 나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나눔은 결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곤경에 처한 이웃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준다. 이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이런 유언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이다. 지난 일 년, 혹은 지나온 세월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리고 앞으로 베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절기다. 동시에 이웃과 감사를 ‘나누는’ 절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감사절을 가장 뜻 있게 지키기 위해선 나눔이 있어야 하고, 나눔을 위해선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의 축제가 될 수 있다.

 

나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일 년에 3번(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모든 성인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사건(출애굽과 광야생활)을 모든 백성들이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 절기는 모든 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의 축제이면서 동시에 민족적인 신앙교육의 장이었다. 특히 감사절(칠칠절과 초막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눔의 실천’이다. 주변 어려운 이웃들과 나눔을 실천해서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본문은 ‘초막절’(혹은 수장절)에 대한 규례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유래다. 하나님은 이 절기를 명하시면서 자신과 가족, 가정에 속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 그리고 그 땅에서 나그네로 있는 이방인들까지 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절이 되도록 하라고 당부하셨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14). 나눔이 감사절의 근본이고 핵심 요소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이웃과 나눔으로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축제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나눔은 교양의 척도이다. 동시에 신앙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눔은 스스로의 신앙과 품위 있는 삶을 고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계2,3장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 큰 시련이나 박해가 없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회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 채 책망만 들었다. 이유는 나눔이 없는, 나태하고 이기적인 모습 때문이다. 당시의 교회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도 구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두 교회는 나눔과 섬김에서 거리가 있었다. 결국 그것이 주님께 책망만 듣게 된 것이고, 스스로를 약화시키고, 몰락을 초래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눔을 손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장 내게서 나가는 것만 생각하면 손실이고 손해가 분명하다. 하지만 나눔은 장래를 위해 가장 확실하고 좋은 투자다. 성경은 나누는 사람은 반드시 ‘풍족하고 윤택하게’(잠11:25) 된다고 말씀하였다. 또한 ‘장래를 위한 좋은 터를 쌓는 것’(딤전6:19)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약속된 말씀을 믿고 풍성하게 나누는 삶 되기를 바란다.

 

희생

나눔은 이론이나 구호가 아니다. 나눔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무슨 일이든 실천에는 반드시 헌신과 희생이 따른다. 그러므로 감사의 나눔이 성공적으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오천 여명의 사람들이 사흘이나 먹는 것도 잊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제자들이 주님께 이제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서 요기(療飢)라도 하게 하자고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곳은 빈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만큼의 돈도 없었다. 그 때 한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고, 주님은 그것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요6:1~13). 나누기 위해선 이 아이처럼 자신의 희생(배고픔)을 감수하는 헌신(도시락을 드림)이 요구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헌신과 희생은 결코 손실이나 손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기 도시락을 드린 이 아이를 포함해서 모두가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나눔의 희생(헌신)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물론 이 기적은 주님이 하신 것이지만 한 아이의 희생적인 나눔을 통해서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희생과 헌신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절기에 하나님을 뵈러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신다(16).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나눔’ 예물을 준비하여 오라는 것이다. 그래야 14절에서 말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고, 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의 축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눔을 위해서는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함께 나눌 예물을 드린 원칙도 말씀하였다. 바울은 이를 ‘헌금의 원리’에 적용하였다(고후9:7). ①‘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주님이 베풀어 주신 복을 기억하라! 이것이 나눔의 출발이다.), ②‘네 힘을 헤아려’(자신의 형편에서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③‘자원하는’(억지가 아니라 즐겁게) 예물을 드리라(10,17). 감사의 축제가 이웃과 나눔의 축제가 되려면 이와 같은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으로 준비한 나눔이 있을 때 모두가 즐겁고 감격스러운 감사의 축제가 된다. 나눔이 있는 곳에 희생이 있다!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감사의 축제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이 된다.

 

그러나 나로부터

어느 부자가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인은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려고 한다. 너희들의 생각은 어떤가?’ 동물들은 일제히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주인이 거위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잔치에선 거위요리가 좋겠다!’ 그러자 거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주인님, 저는 큰 알을 낳아주잖아요. 저 암탉을 잡으시지요!’ 암탉이 손을 저었다. ‘저는 아침을 알려줍니다. 양을 잡으시지요!’ 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저는 따뜻한 털을 제공한답니다. 말고기는 어떤가요?’ 말이 소를 가리켰다. ‘주인님이 여행가실 때 누가 태워줍니까? 암소고기가 최고지요!’ 이번에는 소가 말했다. ‘나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주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동물들은 잔치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자신의 희생은 꺼렸다.

 

이것이 현재 우리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축제가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가 되려면 풍성한 나눔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눔을 위해서는 희생과 헌신이 요구된다. 그 희생과 헌신은 ‘나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모든 동물들이 잔치와 축제는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이 헌신해야 한다는 점에선 주저했다. 오늘날 우리의 축제가 모두가 즐거운 감사의 축제가 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희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풍성한 나눔이 일어날 수가 없다. 나의 희생과 헌신은 나눔의 마중물과 같다. 이로써 다른 사람의 희생과 헌신을 끌어내어 나눔을 풍성하게 만든다(워너메이커와 농부). 오늘 여러분이 과일 꾸러미를 들고 와서 이 강단을 과일 무더기로 만든 것처럼, ‘나로부터’ 이런 헌신과 희생이 일어난다면 나눔은 더욱 풍성해 질 것이고, 우리 교회는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축제의 장소가 될 것이다. 주변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나눔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주님께서 소원하시는 교회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감사 바이러스가 되자!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은 ‘암’이다. 그런데 암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감사불감증’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현대를 ‘불평문화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이 때문에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각종 종양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분명히 발전하였고, 사람들의 삶의 질도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불평문화에 찌들려 점점 회색지대로 변해가고 있고, 인간들의 마음 또한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회색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모두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감사가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5:18). 바로 이 감사를 주변으로 확장시키고 퍼뜨리는 것이 ‘나눔’이다. 바로 이 나눔이 감사 바이러스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나눔을 실천해서 주변에 감사를 퍼뜨리는 감사 바이러스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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