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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을 모르는 사람,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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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746회 작성일 13-10-1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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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을 모르는 사람, ‘모세’

출11:1~8

2013. 10/13. 08:00, 11:00

타협과 양보의 시대

춘추전국시대에, 뛰어난 학식과 곧은 의지를 가진 초(礎)나라 사람 ‘굴원’(屈原)의 일화다. 정적의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가는 그에게 한 어부가 말을 걸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흐려 있거늘 당신은 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굴원이 어부에게 말했다. ‘맑고 깨끗한 몸에 어찌하여 더러움을 받아들이겠는가? 강물에 빠져 고기밥이 될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에 세속적인 먼지(塵埃)의 더러움을 묻힐 수 있겠는가?’ 이 때 어부가 그를 강가에 내려주고는 뱃전을 두들기며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떠나갔다.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는 말이다. 이 풍진 세상에서 당신만 고고한들 누가 알아주겠는가? 혼자 세상을 등지고 사느니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흙탕물이라도 튀기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소위 어부가 굴원에게 충고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굴원은 귀양생활을 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지고 만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굴원의 강직한 성품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 살라는 어부의 충고도 일리가 있다.

 

아무튼 어부의 충고처럼 타협과 양보는 이 시대의 핵심가치다. 무엇이든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타협하는 것, 민주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한 소양이자 성숙함의 상징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오직 믿음,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우리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이 이와 같은 세상에선 불편한 종교, 불편한 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가치충돌 때문에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갈팡질팡하고, 또한 세상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있다. 이런 세태(世態)에서 타협하지 않고 ‘오직 믿음, 절대 진리’에 기초한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것은 실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모세의 시대에도 여전했던 문제다. 그래서 모세는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열 가지 재앙

 하나님의 설득에 빨리 항복하면 복이지만 끝까지 거부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결국은 항복하면서도 큰 화를 당하게 된다. 바로가 그랬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바로를 수차례 설득하셨다. 하지만 바로는 계속 거절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건국이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심판하셨고, 결국 바로는 이 재앙들을 다 겪은 후에야 비로소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내리신 그 열 가지 재앙은, 나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재앙(7:20~25), 개구리 재앙(8:1~7), 이 재앙(8:16~19), 파리 재앙(8:20~24), 모든 이집트 사람의 가축에게 돌림병(역병) 재앙(9:1~7), 악성 종기 재앙(9:8~12), 우박 재앙(9:22~26), 메뚜기 재앙(10:12~20), 삼 일 동안 흑암 재앙(10:21~23), 그리고 모든 이집트 사람의 장자와 가축의 첫 것을 죽이는 재앙(12:29~30)이다.

 

이 열 가지 재앙은 모두 이집트의 종교와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일례로, 그들은 나일 강을 신성한 존재로 숭배를 했는데, 다양한 신들이 나일 강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몸에 양의 머리를 가진 크눔(Khnum)은 나일 강 수호신으로 나일 강을 그들에게 준 신이다. 소티스(Sothis)는 나일 강 홍수를 관장하는 신이고, 또한 그들은 나일 강을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신 오리시스(Orisis)의 핏줄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강을 피로 바꿔 죽음의 강이 되게 하셨다. 이것은 나일 강과 연관된 모든 신들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재앙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열 번째 장자를 죽이는 재앙은 바로의 신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바로를 생명을 주는 오시리스(Osiris)와 태양신 레(Re)의 화신(化身)으로 믿고 있었다. 바로의 임무는 신들의 은총을 유지하고, 질서의 여신 마아트(Ma'at)의 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의 죽음도 막지 못하는 무능한 자라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하여 드러났다. 따라서 이 재앙은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수많은 신에 대한 심판이었고, 그들이 섬기는 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천지만물과 모든 존재들, 특히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타협을 제시한 바로

이와 같은 열 가지 재앙이 진행되는 동안 바로는 4번 모세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가장 먼저 제안한 것은,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8:25)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의 자유는 허용하겠지만 그들을 계속 자신의 노예로 두겠다는 속셈이다. 사단 역시 신앙생활은 하되 세상을 떠나지 말라. 즉 세상적인 가치관을 떠나지 말라고 속삭인다. 세속적인 것들을 즐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다(세속적인 혼합주의). 참된 신앙은 단절(떠남)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집트(세상, 죄, 사단)에서 떠나야 한다.

 

두 번째 타협안은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8:28)고 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은 적당히 믿으라는 말이다(적당주의). 예수를 믿어라. 그러나 너무 유별나게 믿지는 마라.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술 끊고, 담배 끊고, 십일조하고, 주일날 가게 문 닫고, 예배시간마다 은혜 받았다고 질질 짜고, 수요예배 나가고, 거기다가 구역모임까지 그렇게 별스럽게 믿지 마라는 것이다.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에 적당히는 없다. ‘제대로’ 믿고, ‘제대로’ 섬기고, ‘제대로’ 살아야 한다.

 

세 번째 타협안은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10:11)고 했다.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재산은 여기에 두고, 대표로 남자들만 가서 제사하는 것이다. 즉 번잡하게 다 가지 말고 편리하게 대표로 남자들만 가라는 것이다(편의주의). 혼자만 믿으라는 말이다. 열심히 믿어도 좋다. 그러나 너 혼자만 열심히 믿어라. 신앙은 자유니까. 부모, 형제, 남편(아내), 자녀, 이웃은 관여하지 말고 너 혼자만 열심히 믿으라는 것이다. 나 혼자 잘 믿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사단의 전략에 속은 것이다. 주님은 모두가 믿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네 번째 타협안은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10:24)고 했다. 빈손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소와 양 같은 물질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물질까지 드릴 필요가 무엇이냐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를 아무 것도 헌신하지 않는 말뿐인 신앙, 곧 위선적인 신앙에 빠지도록 만든다(위선적인 형식주의). 물론 하나님 앞에서 그 무엇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비록 자기 몸을 불살라 드릴지라도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헛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가벼운 것이 물질이다. 이런 물질조차 헌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어떠한 헌신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입술의 고백만 무성한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물질적인 헌신 없이는 건강한 신앙이 힘들다. 그 사람의 신앙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물질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다.

 

타협하지 마라.

사실 바로가 재앙을 피해 볼 심사에서 이와 같이 여러 방법으로 타협안을 제시하긴 했지만 핵심은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겠다는 꼼수였다(네 가지 타협안 참조). 모세는 바로의 이러한 꼼수를 알아채고 타협을 단호하게 거부했다(8:26,29, 10:25~26).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와 같은 바로의 타협안에 이미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바로는 자신의 제안이 번번이 실패하자 화를 내면서 다시는 모세를 보지 않겠다며 쫓아냈다. 그러자 모세 역시 결별을 선언하고 바로 앞을 나왔다(10:29). 그리고는 본문에서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선포하였다(4~6).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8). 이제는 찾아가서 보내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찾아와서 제발 나가달라고 사정해야 나가겠다는 뜻이다. 이제는 어떤 타협안도 듣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냐(3:10)며 사양했던 그가 이토록 담대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서 타협할 줄 모르는 이와 같은 모세의 담대함이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약속의 말씀(1)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사단의 위협과 회유 앞에 무너지게 되고, 적당히 타협하게 된다. 그리고 타협하는 순간 그의 존재감은 사라지게 된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약속의 말씀에 확고하지 못해 타협하게 되고, 타협한 순간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였다. 반면에 모세는 온갖 회유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타협을 거부했더니 도리어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다.’(3).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7:1). 신자의 권위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길 때 주어진다. 본문의 바로는 사단의 상징이다. 바로의 모습에서 사단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사단은 조금씩 조금씩 타협하기 원한다. 하지만 한 발짝 물러나면 결국은 다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바로가 제시한 세속적인 혼합주의, 적당주의, 편의주의, 위선적인 형식주의의 타협안을 사단이 그대로 우리에게 사용하고 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담대하게 거절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상실한 신자와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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