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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보내라!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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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536회 작성일 13-10-0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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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보내라! ‘모세’

출5:1~9

2013. 10/6. 08:00, 11:00

돌아온 모세

지난 주 두 거물급 정치인(손학규와 서청원)의 정가복귀가 화제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인생이란 저벅저벅 떠나 터벅터벅 떠돌다가 머뭇머뭇 돌아온다.’고 표현한 어떤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삶(生)이란 이런 생활의 연속이고, 죽음(死)이란 이런 생활이 끝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초라한 모습으로 떠났다가 화려한 모습, 소위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성경에 나온 탕자처럼 화려하게 떠났다가 쫄딱 망해 거지가 되어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다. 혹은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모든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본문 앞부분(4:18~31)에서, 살인자로 도망쳤던 모세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이집트로 돌아온 이야기가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절하던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 앞에 드디어 항복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설득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항복은 빠를수록 좋다. 모세는 처가식구들과 작별을 하고(4:18) 가족을 데리고(19) 이집트로 출발했다. 먼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마중 나온 형 아론을 만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사건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하여 이야기했다(28). 그리고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와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 증표로 이적(세 번째 기적)을 베풀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믿고, 자신들의 구원자로 그를 보낸 것을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백성들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4:31). 40년 만에 돌아온 그를 그가 생각했던 것(4:1)과는 달리 백성들이 환대하며 신뢰와 지지를 보내 것이다.

 

이렇게 돌아온 모세는 40년 전 그가 이집트를 떠날 때와 외견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달라진 것은 아내와 아들, 그리고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용상으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40년 전엔 살인을 저지르고 백성들에게 외면을 당했고, 아무런 비전도 없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친 도망자였다. 비참한 모습으로 이집트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민족구원이라는 비전과 사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 되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님을 만난 우리 신자의 모습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바로 앞에 나선 모세

 나폴레옹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게 되었다. 온갖 고생 끝에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나폴레옹이 망원경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20만 명이 기절할 한 마디를 했다. ‘이산이 아닌가벼?’ 다시 산을 내려와 완전히 죽을 고생을 하며 다른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번엔 나폴레옹의 한 마디에 50만 명이 죽고 말았다.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벼!

 

리더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다. 리더의 말 한마디가 따르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리더의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리더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모세의 리더십을 시험하는 중요한 계기다. 백성의 신뢰와 지지에 격려를 받은 모세는 아론과 함께 이집트 왕 바로를 찾아갔다. 그리고 당당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

 

위기에 직면한 모세

비슷한 내용이 3절에도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집트를 나가야 한다.’는 것은 모세가 바로에게 거듭 요구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신자의 구원은 단순히 ‘~부터’(from) 구원을 넘어 ‘~을 위한’(for) 구원이다.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을 넘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구원이다. 그러나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2)는 말로 그의 요구를 일축했다. 오히려 이런 요구를 게으름에서 나온 망상으로 몰아붙이며(4,8),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노동을 강요했다. 이러한 바로의 태도는 모든 착취집단의 폭정을 대표한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조건을 변경시키려는 어떤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게으름으로 단죄하고、안전을 해치는 위험신호로 간주한다.

 

바로는 게을러서 이런 헛된 생각을 품은 것이니 벽돌을 만드는데 필요한 짚을 주지 말고 스스로 짚을 주워서 전과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도록 했다(7~9). 혹을 떼러갔다가 혹을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파피루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 사람이 하루에 만들어야할 벽돌 양이 2,000장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루에 감당하기 불가능한 양이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역에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거기다가 재료까지 스스로 구입해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이는 백성들이 모세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모세로 하여금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잔인하고 교활한 조치였다. 결국 ‘내 백성을 보내라!’는 모세의 말 한마디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왔고, 모세(와 아론)는 백성의 모든 원성을 감당해야 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21). 이제 그는 바로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도 불신과 배척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치러야할 대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당신의 뜻을 알렸을 뿐 아직 시작도 안하셨다.

 

어려움은 당연히 있다.

지금은 국화의 계절이다. 1억 송이로 장식된 박람회 국화정원이 장관이었다. 서정주 시인은 늦가을에 피어나는 국화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피를 토하며 울었고, 여름날엔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고, 가을밤엔 무서리가 내렸다고 했다. 삶의 결실은 수많은 어려움을 통해 얻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 어려움이 없이 절로 되는 것은 없다. 의미 있는 것일수록 그에 따르는 어려움 또한 크고 중한 법이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모든 장애를 다 제거한 다음 사역을 맡기지 않는다. 바로의 마음을 바꿔놓은 다음 모세를 보낸 것이 아니다. 바로는 여전히 바로였다.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가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어려움이 사라져야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항이 없어야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해야 섬기고, 돈이 있어야 헌금을 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섬기다보면 건강해지고, 물질을 헌신하고 베풀다보면 더욱 풍성해지고 부유해진다. 이것이 형통의 원리다.

 

모세에게 이와 같은 어려움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주지 아니하리니”(4:21). 바로가 쉽게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많은 어려움과 저항이 따를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려움과 저항을 제거하시지 않고 모세를 보냈다. 어려움과 저항을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 사역의 길이고, 사역자의 길이다. 신앙의 길이고, 신자의 길이다. 그러니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이나 시험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일부로 생각하고, 당연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무풍천지 무화개, 무로천지 무결실’(無風天地 無花開, 無露天地 無結實)이라고 했다. 바람이 없으면 꽃이 피지 않고, 이슬이 없으면 결실이 없다는 뜻이다. 안일한 생활에는 좋은 결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려움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약속을 붙드는 믿음

사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어려운 현실이나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확실성’이다. 어려운 현실과 직면한 문제의 해결에 대한 불확실성이 문제이다. 아무리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만나도 안전한 상륙이 보장되었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그런데 우리 신자에겐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었다. 어려운 이 현실과 직면한 문제를 반드시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약속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암울하고 어려운 현실, 불가능해 보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보장된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려움을 예고하신 것처럼 승리에 대한 보장도 이미 약속하셨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3:20).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6:1). 당장에는 어려움과 저항이 있지만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다. 승리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지만 모든 일은 바로의 말대로 바로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무기도 군대도 없이 맨손이었던 모세가 당시 세계 초강국 이집트의 왕 바로를 굴복시키고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약속을 보지 못하게 하고 문제를 보게 한다. 약속은 작게 보이게 만들고, 문제는 항상 확대해서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마귀의 시각이다. 반면 성령의 시각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크게 보이게 하고, 문제는 작게 보이게 한다. 아무튼 마귀적 시각은 신자가 넘어야 할 큰 고비다. 신자의 길이 좁은 길, 고난의 길이지만 그 길 끝에 축복이 보장되어 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멸시와 천대의 길이지만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 신앙의 삶은 날마다 투쟁의 삶이지만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보장된 약속을 붙잡고 힘차게 전진하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 보네.

내 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 마다

주님약속 새겨 봅니다.

-복음찬양「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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