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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소낙비를 내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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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800회 작성일 14-03-0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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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소낙비를 내려주소서!

요4:1~18

2014. 3/9. 08:00, 11:00

마음의 사막화(Desertification)

황사나 미세먼지와 같은 단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생소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익숙한 단어가 되었고, 또한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이들은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쾌적한 일상생활과 산업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기후변화에 따른 사막화 현상 때문이다. 매년 무서운 속도로 사막과 황토고원이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땅이 이렇게 사막이 되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사막이 되는 것은 더욱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이다. 물리적인 사막화보다 심리적인 사막화가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사막의 이미지는 ‘황량함’이다. 사막의 그 황량함은 물과 연결되어 있다. 물이 없으면 사막이 된다. 물론 그곳에도 생명이 있다.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풀과 나무를 보면 넓고 푸른 잎은 없고 메마르고 앙상한 가시로만 덮여있다. 실은 이 가시들이 잎이다. 잎이 넓으면 수분을 쉽게 빼앗기기 때문에 물을 아끼기 위해 잎이 가시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선 나무나 풀을 함부로 만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짐승이나 곤충까지도 치명적인 맹독을 지니고 있다. 거친 환경에서 생활하다보니 독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도 비가 자주 내려 물을 충분히 공급받으면 나무나 풀의 잎들이 점점 커지면서 가시가 사라진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은혜의 소낙비가 내리지 않아 생수가 끊기면 ‘심령의 사막화’, ‘심령의 가시화’는 시간문제다. 그러나 은혜의 비가 내리면 우리의 마음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마음에 있는 가시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고 위로가 되는 넓은 잎사귀가 돋아나고, 아름다운 꽃과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된다.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심령의 사막화를 막고, 사막이 된 심령을 옥토로 만드는 ‘은혜의 소낙비’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인생의 사막 한 가운데서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외딴 섬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그녀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녀가 참으로 고단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6,7절 말씀이 잘 보여준다. ‘때가 여섯시 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여기서 여섯시는 지금 시간으론 정오(낮 12시)다.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이라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야외활동을 하지 않고 모두 집 안에서 낮잠을 자거나 쉬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시간에 물을 길으러 우물로 나왔다. 이는 그녀가 이웃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는 사연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꺼린 것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이 꺼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 시간을 택한 것 같다. 그 이유가 18절에 나온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이 이렇게 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웃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외톨이가 된 것이다.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우연히 만나 뱀에게 ‘사막은 사람이 없어 무척 쓸쓸하구나.’고 했을 때, 뱀이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도 외롭긴 마찬가지야!’ 라고 대답을 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 살아도 그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면 그곳 역시 외롭고 쓸쓸한 사막이다. 요즈음 송파구 세모녀 자살사건으로 정부의 복지정책이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정부 때문 만이겠는가? 아무튼 이 사건은 지금 우리 사회의 심각한 사막화를 반영해 준다. 비록 그녀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아무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고,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고,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인생은 사막이었다. 인생의 사막 한 가운데서 목말라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그녀의 심령은 사막이 되고, 가시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자신을 채우기 위해 여섯 명의 남자를 만났지만 오히려 이웃에게 손가락질만 당하며 이웃과 단절만 경험했고, 상처에 더 깊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을 피하려고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이 시간에 물을 길으려 홀로 우물에 나온 것이다. 이 여인이야말로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대중 속에서 시끌벅적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늘 외롭고 쓸쓸한 우리, 무엇인가를 지독하게 추구하지만 항상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에 허덕이는 우리, 그러면서 심령은 사막이 되고, 가시밭으로 변해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살면서 쉽게 상처를 받고, 또한 상처를 주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사막이고, 가시투성이기 때문이다.

 

사막을 가로질러 오신 분

 이렇게 사막 한 가운데 갇혀서 사막이 되어가고 있는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사막을 가로질 오셨다. 본문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실 때 일어난 이야기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오랜 앙숙지간(怏宿之間)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그들과 대화는 물론 접촉하는 것조차 싫어하여 그 지역을 밟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쪽 유대인이 북쪽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가깝지만 멀어도 요단계곡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 이와 같은 주님의 행보가 의도된 것임을 본문은 강조한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 꼭 그곳을 통과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은 너무 더우니까 한 낯을 피하여 여행을 하는데, 한 낯에 서둘러 여행을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바로 본문에 나온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인생의 사막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여인, 그 심령이 사막이 되고, 가시밭으로 변해가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오랫동안 지켜 내려온 경계선을 훌쩍 넘어서게 한 것이다. 한 낯의 뜨거운 태양도 그 걸음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주님은 생수를 가지고 목마른 그녀에게로 달려오신 것이다. 주님은 먼저 우물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셨다(6). 그리고 그녀가 물동이를 이고 나타나자 “물을 좀 달라”(7)고 먼저 말을 걸었다. 같은 마을 사람들도 말을 걸기는커녕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는 이 여인을 주님이 먼저 기다렸고,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곧 주님 사랑의 특징이다. 그녀는 몰랐지만 주님은 그녀를 아셨다. 그래서 경계선을 넘어 여행금지구역으로 들어가셨다. 먼저 그녀를 기다리셨고, 또한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이 모두가 그녀에겐 우연처럼 보였겠지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그리고 이 만남이 사막과 같은 그녀의 인생에 생수가 된 것이다. 은혜의 소낙비가 그녀의 심령에 내리고, 생수의 강물이 스며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생수와 같은 사람이 되다.

이스라엘은 사막을 이용한 대표적인 농업국가다. 국가수출의 절반 이상을 농산물이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에는 대개 이스라엘의 채소와 과일들이 공급되고 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과일이나 채소의 품질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막이라 일조량이 풍부해서 좋은 품질이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막도 물만 공급되면 일반 땅보다도 더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만 공급되면 사막도 꽃과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는 생명의 땅, 낙원이 될 수 있다. 본문에 나온 이 여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 여인은 여섯 명의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이웃에게 외면을 당한 비참한 존재였다. 그런데 주님이 주신 생수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우선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당당하게 말했다.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29)고 외쳤다. 이렇게 자신의 상처를 여러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상처가 이미 치유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이 주신 생수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찌르는 가시를 다른 사람의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고 위로가 되는 넓은 잎사귀로, 아름다운 꽃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또 하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주님이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증거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외면을 당하다보니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먼저 마을로 뛰어 들어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을 만나서 자기가 만난 주님에 대하여 말하였다(28). “와서 보라”(29)고 외쳤다. 그리고 그녀로 인하여 그날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39). 두려움의 대상, 거부의 대상, 기피와 불편함의 대상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막이 옥토로 변한 사건다. 주님처럼 생수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

 

은혜의 소낙비를 주소서!

어떤 땅이든 삼 년만 비가 오지 아니하면 사막이 되고 만다. 사람도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생수가 끊겨지면 그 심령은 금방 황폐한 사막과 같이 되고 만다. 생수가 끊어지면 인간성은 파괴되어 그가 가진 많은 지식도, 경험도, 물질도 다 쓸모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도구가 된다. 그러니 사막은 자신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막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도 다 죽인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 문명, 지식, 기술이 하늘까지 닿을 만큼 눈부시게 발전(달)한 세상에서 생활의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평안이 없고,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불안함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늘 외롭고 쓸쓸하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수고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우리 인생이 삭막한 사막 가운데 있고, 우리의 마음이 사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 심령에서 생수의 샘이 솟고, 생수의 강이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은혜의 소낙비가 내려야 한다. 비가 내려야 샘이 터지고 강이 흐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그 주님 앞에 엎드려 은혜의 소낙비를 구하자. 우리 심령에, 가정에, 교회에 은혜의 소낙비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자. 그러면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서 생수의 샘이 솟고, 생수의 강이 흘러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 모든 가시를 잎사귀로 아름다운 꽃으로 열매로 변화시키는 회복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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