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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들을 수 있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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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5,290회 작성일 23-07-0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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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들을 수 있는 복

10:21~24

2023, 7/9. 11:00(성령강림 후 여섯 째 주일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가 쓴 내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에세이가 있다. 이를 보면 우리의 일상이 온통 감사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일상에 대해 무딘지 또한 알 수가 있다.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만약 내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어요. 점심때는 멋진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소망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는 너무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이다.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도, 새벽에 떠오르는 먼동도, 하늘의 별도 마찬가지다. 헨렌 켈러에겐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것들인데, 우리에겐 일상에서 애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것에 대한 중요성을 잊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에 익숙한 것이다. 그러므로 잘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옛말에 내 몸이 100냥이면 눈은 99이라고 했다. 눈의 비중이 크고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사는 것은 눈과 관련이 깊다. 여행을 하고, 체험을 하고, 공부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눈을 띄우고, 눈을 넓히고, 눈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은 눈 바꾸는 훈련이다.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바라보던 눈을 신령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꾸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세상도 역사도 다른 사람도 주님을 통하여 바라보는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다.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일상에서 잘 볼 수 있도록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모두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기쁨

본문은 70인의 전도파송과 그들의 전도보고 이후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이다(본서의 순서상 이렇게 표현한 것임. 앞 사건에 대한 반응인지, 아니면 독립된 사건인지는 떠져볼 일지만 여기선 생략).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기록은 별로 없고, 슬퍼하시고, 탄식하시고 우셨다는 기록이 많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뻐할 일보다 슬프고, 괴롭고, 그래서 울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21a)고 했다. 흔치 않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죄인인 인간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21b). 주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더 많이 알고, 더 넓게 알고, 더 깊이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통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아는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22). 전도가 주님께 기쁨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하나님의 알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주님의 감사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 대한 축사다.

 

주님의 감사

우선, 주님은 하나님의 경륜(계획)에 대하여 감사를 한다.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1). 여기서 어린 아이는 그냥 어린 아이가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별 볼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실 당시 주님의 제자들이나 주님을 따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아이와 같았다. 당시 사회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복음서(특히 마가복음에서)를 보면, 대중(백성)을 뜻하는 단어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라오스(λαος)이고 다른 하나는 오클로스(οχλος). 라오스는 영역 의 사람들이라면오클로스는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오늘의 용법으로, ‘국민 대 비국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오클로스는 훨씬 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었다. , 부도덕하고 무책임하여 정치적 주권을 가져서는 안 되는 존재들로 취급되었다그런데 당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오클로스라고 했다. 본문에서 어린 아이가 바로 오클로스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의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다.

 

바울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복음의 진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로선 그저 감사할 따름인 것이다. 이런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고, 복음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고, 일꾼이 되었겠는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로 놀라워...’ 라는 고백은 존 뉴턴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것이 주님의 감사요, 기쁨이었다.

 

주님의 축사,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에 대하여

무엇이 되었든 결핍이라고 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그 중에서도 헬렌 켈러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은 정말 불편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영적소경이다. 영적 소경은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없고, 신령한 은혜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근원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23).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영안이 열려 신령한 것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오클로스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눈이 열려 복음을 본 것이다. 복음은 곧 예수님 자신이다. 특히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본 것처럼 나를 본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보면서도 주님을 자신을 구원하시는 복음으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4). 주님은 보는 것,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를 확인시켜주시는 말씀이다. 여기서 많은 선지자와 임금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구원자이신 메시야를 그토록 보기를 소망했고, 그의 음성 듣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고만 받았을 뿐 직접 보거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직접 메시야로 오신 주님을 보고 있고, 또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분의 사역에 동참까지 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위로이면서 동시에 축사 혹은 격려사인 셈이다. 그러니 기뻐하라는 것이다. 앞에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영적인 눈이 열려 복음이신 주님을 보고, 영적인 귀가 열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고 듣는 것이 복이다. 거기다가 영적인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주님을 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복중에 복이다. 이런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항상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령한 눈이 열리면

신령한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야 말씀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특히 예수님이 구주임을 믿게 된다. 말씀을 듣고 소망이 생기고, 새 힘을 얻게 된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가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아 캄캄한 인생을 살다가 영적인 눈이 열려 놀라운 인생을 살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설교를 마치려고 한다.

 

한 가난한 15세 소년이 실명하고, 몇 번의 자살시도를 하다가 내가 죽어도 유서 한 장 남기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점자공부를 시작했다. 점자공부를 하던 어느 날, 그에게 점자를 가르쳐준 선생님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사람에게는 4가지 눈이 있다. 물질을 보는 육안(肉眼), 지혜를 터득하여 가지는 지안(智眼),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 예수님을 믿을 때 신령한 것을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이 그것이다.’ 선생님의 말을 들은 소년은 자신이 잃은 것은 단지 1/4분인 육안만 잃고 지안, 심안, 영안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다짐했다. ‘비록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지안, 심안, 영안에 인생을 걸자!’ 심기일전하여 새 출발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유학길에 올라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총신대 교수가 되고총신대 총장까지 되었다. 그는 우리와 가까운 지역 출신이다. 황전면 회룡리에 삽재팔동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 출신 이재서라는 사람이다. 눈이 열리니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들이 보였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꾸었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눈 뜬 사람도 이루기 힘든 일들을 이뤄냈다. 더 깊이, 더 높이, 더 멀리, 더욱 선명하게 신령한 것들을 볼 수 있는 영안이 활짝 열리고, 천둥소리처럼 크고 분명하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가 열리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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