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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모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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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82회 작성일 14-08-1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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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모이기’

행2:46~47

2014. 8/10. 08:00, 11:00

모든 관계는 모이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관계는 모이는 데서 시작된다. 몇 사람이든 모이면 그곳에 관계가 발생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모임에 열심히 모이고 있는 것이다. 가족끼리 모이고, 친족끼리 모이고, 또래끼리, 동호인끼리, 동료끼리, 이상과 신념이 같은 사람끼리, 여러 모양으로 모이면서 관계를 넓혀간다. 교회도 주님을 따르던 적은 수의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 탄생했다. 주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다음 120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행1:12~15). 이것이 최초의 기독교회였다. 본문은 이 교회의 모습이다. 물론 단편적이긴 하지만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 신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열심히 잘 모인 교회

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46)이다. 즉 모이는 교회였다. 그들은 날마다 모였고(횟수와 시간), 마음을 같이하여 모였고(자세), 성전에 모였다(장소). 그리고 날마다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모여서 서로 교제하고,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서로 섬기고,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내용).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참 한가했나보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일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어야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바쁘고 고단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 속에서도 그들은 매일 성전에 모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이다. 힘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힘쓰다’는 생사가 걸린 전쟁터에서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이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불가능한 상황을 뛰어넘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덤비는 사람은 누구도 무엇도 당해낼 수 없다. 초대교회에는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모이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모이는 것을 구심운동(求心運動)에 비유할 수 있다. 구심운동은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 곧 구심력(求心力)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은 안으로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다. 주님과 교회와 지체에 대한 ‘사랑’이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한 ‘열정’이고, 주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이런 것들이 날마다 모일 수 있도록 그들을 교회로 끌어당긴 것이다. 그러므로 잘 모인다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열정의 표현이다. 소망의 표현이다. 또한 건강함의 표현이다(물론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영적 상태를 판단해서도 판단할 자격도 없다.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신앙과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그것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모이는 것이다).

 

모이는 것의 중요성

교회 성장학에 따르면, 신자가 1주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기도도 하고, 성경을 읽지만 해소되지 않는다. 2주를 빠지면 빠지게 된 이유가 생기게 되고(자기 합리화), 그러다가 3~4주째 빠지면 덤덤해진다. 그러면서 교회와는 이미 떨어진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서너 달이 넘으면 자신이 술집에 앉아 있거나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한 주간에 한번이라도 교회에 나와야 신앙의 생명이 유지된다. 은혜받지 못한 공치는 날이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된다. 그냥 왔다가 가는 것 같아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곳이 교회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이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열심히 모이면 교제가 깊어진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찾아가서 만져보고, 확인해보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여 직접 체험해보는 것이 더 중요한다는 뜻이다. 교제도 모여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자주 모여서 만나는 것이 교제를 더욱 친밀하게 하는 방법이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트레이드마크가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생활이다. 이것은 친밀한 교제의 산물이다. 내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믿음 안에서, 사랑 안에서, 소망 안에서, 복음에 대한 열정 안에서 늘 모여 만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 교제생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로마황실 고문서인데, ‘기독교인은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왜 부도덕한가? ‘노예와 주인이 함께 먹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함께 먹을 뿐만 아니라 형제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빌레몬서 참조). 이것이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엄격한 계급사회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당시 신자의 교제가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에 비례한다. 자주 모여서 만날수록 마음의 거리, 영적인 거리도 가까워진다. 교제는 접착제와 같다. 그러므로 친밀한 교제는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여기서 은혜로운 예배, 합심기도, 뜨거운 찬양, 놀라운 헌신 등 모든 것이 나온다. 그러니 신앙생활에서 열심히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이 필요 없다.

 

열심히 모이면 믿음이 성장한다.

해방이후 이념논쟁이 한창일 때, 세 종류의 ‘빨갱이’가 있었다고 한다. ‘사과’ 빨갱이, ‘토마토’ 빨갱이, ‘수박’ 빨갱이가 그것이다.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얀 사과처럼 사과 빨갱이는 겉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 같은데 속은 자유 민주의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고, 겉도 속도 빨간 토마토처럼 토마토 빨갱이는 겉과 속이 모두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속만 빨간 수박처럼 수박 빨갱이는 겉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 같으나 속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가장 위험한 사람이 세 번째 ‘수박’ 빨갱이다. 이 시대의 문화나 가치관, 풍조들은 영적 수박 빨갱이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발톱을 감추고 접근하고 있는데, 그들의 공격 목표는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수많은 신자와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도 흩어버리면 금방 사그라진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자석(磁石)을 중심으로 모인 쇠붙이에 자력이 생긴 것과 같은 원리다. 자석에서 멀어질수록 자력이 점점 약해지다 사라지고, 자석에서 가까울수록 자력이 강해진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자석과 같다. 이 교회를 가까이하기 위해 자주 모일수록 믿음이 강력해진다. 초대교회가 탄생한지 얼마 되지도 않고,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2:7b)는 말에서 보듯이 구성원들도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이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통하여 굉장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행2:7a). 그들이 한 일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것밖에 없다. 그저 모여서 말씀 배우고, 모여기서 기도하고, 모여서 찬양하고, 모여서 교제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믿음이 자란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하고, 나아가서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믿음으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오늘날 신자와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부유해졌지만 영적인 능력을 상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이는 것이다. 믿음은 선물이지만 그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모이는 것, 즉 예배를 위해, 기도를 위해, 성경공부를 위해, 찬양을 위해, 교제를 위해 모이는 것은 믿음에 영양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이 외에도 모이는 것은 사단의 전략과 전술을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모이기를 권하라.

나는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한 증거가 없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 하겠다.’고 주장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봉사를 하는 이유는 주님을 믿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교회가 외국에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친교와 교제의 장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부유한 좋은 가정출신으로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였다.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으나 6개월 정도 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런 죽음의 위기 앞에선 그녀에게 좋은 가문도, 학력도, 학위도, 남편도, 자식도, 재산도 모두 무기력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회는 마음을 모아 모일 때마다 그녀를 위하여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새벽에도, 수요예배에서도, 구역예배에서도, 주일예배에서도 쉬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자 그녀 역시 교회의 모든 모임에 참여하여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 공동체가 자기 곁에 서서 자기를 붙들고 있음을 체험하였고, 바른 신앙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자신의 병까지 고침을 받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교회의 모임을 통하여 그녀를 만나시고 회복시키신 것이다. 교회의 모임이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인 것을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체험하려면 모이기에 힘쓰자! 또한 다른 사람들도 모이기에 힘쓰도록 권하자!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이것이다. 교회의 모든 모임에 힘써 모이도록 권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복을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은혜의 자리, 복의 자리로 모이도록 권할 수는 있다. 힘써 모이자! 힘써 모이도록 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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