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이런 아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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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58회 작성일 25-04-27 16:48본문
내 아이, 이런 아이가 되게 하소서!
눅2:40
2025. 4/27 11:00(유아세례)
아이는 어른의 치유자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어른들의 영혼은 아이들과 함께 있음으로 치유가 된다.’ 아이는 그 자체로 기쁨과 위로가 된다는 뜻이다. 어떤 가정에 웃음소리가 있을까? 어른이 많은 곳에는 오히려 싸우고 다투는 소리가 나오기 쉽다. 그런데 아이가 있으면 그 모습만 보아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도대체 아이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런 것일까? 아이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고, 순수하고 순진하다. 울다가도 금방 함박웃음을 짓는 것이 아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아이에게 끌린 것이다. 아이를 보며 잃어버린 세계를 반추하고 그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어른이 아이를 보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반대로 아이가 어른을 치유하는 경우도 많다. 어른은 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깨닫게 되고, 영혼의 맑음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잃어버린 순수성을 되찾아야겠다는 열망도 품게 된다. 아이가 우리 어른에게 주는 치유인 셈이다. 매일 우리 한이가 올려주는 윤슬이의 해맑게 웃는 사진과 영상을 보기만 해도 설레고, 참 좋다. ‘한이와 하경이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아니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겠지.......’ 하여간 윤슬이를 볼 때마다 마음의 근육이 풀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보는 것 자체가 어른의 기쁨이고, 상처의 치유라는 말을 실감한다.
어린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어린아이의 과정을 겪으셨다. 주님은 처음부터 어른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린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셨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럽게 자라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주님을 볼수록 영혼이 맑아져서 더 보고 싶고, 더 함께 있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론이고, 사람들도 이런 주님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것이 어린 시절 우리 주님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를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도 주님을 보시면서 치유를 받으셨구나. 위로와 격려를 받으셨구나.’ 부모도 자녀를 키우면서 섭섭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야, 내가 네게 쏟은 게 얼마나 많은 줄 아냐? 사랑을 쏟고, 돈을 쏟고, 마음을 쏟고, 기도와 정성을 쏟았는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섭섭하고 아픈 마음이 때로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상처가 많으시겠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사랑을 주어도 도망가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해도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복을 마치 자기 잘난 맛에 그리된 줄 알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그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상처를 받고,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을까? 예언서를 깊이 읽다 보면 끙끙 앓으시는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라는 모습을 보시면서 위로를 받으신 것이다. 아들 예수님이 자라는 모습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 준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 그들을 손으로 안고, 가슴으로 품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의 부끄러움과 상처, 찢기고 어둡고 더러워진 것을 회복시키는 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녀의 건강은 부모의 첫 번째 바람이다.
모든 부모에게는 자녀를 향한 소원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신앙생활의 초보자라도 자녀를 위해 기도하게 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 무엇을 제일 먼저 기도하는가? ‘내 자녀, 일등하게 해 주세요. 출세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 우리 아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이것이 첫 번째다. 우리 자녀의 성장 모델이신 예수님도 그랬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2:40). 예수님도 영아기를 지나 유아기와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쳤다. 그 과정을 주님은 건강하게 지나셨다. 첫째는 육체적으로 건강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건강하게 자라셨다는 뜻이다. 건강함의 증거는 성장과 성숙이다. 키가 자라고, 이에 걸맞게 정신적, 정서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것이 곧 건강한 것이다. 이 건강에 중요한 또 하나는 회복능력이다. 우리는 감기에 걸릴 수 있고, 아프거나 다쳐서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다. 때론 수술을 받을 수도 있다. 문제는 회복능력이다. 회복하는 능력이 있으면 잠시 아프고, 또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건강한 것이다. 주님은 키가 자라는 성장과 더욱 강해지는 회복력을 모두 갖춘 건강한 아이였다.
둘째로 주님은 정신적으로 건강했다. 지혜와 총명이 풍성한 아이로 자라났다. 자녀를 키우면서, ‘2더하기 4는 몇이지?’ 하고 물었을 때 옳은 답을 하면 부모는 기특하고 기뻐서 박수를 친다. 글자 하나를 읽고, 말을 할 때마다 매우 좋아한다. 특히 처음으로 ‘아빠, 엄마’라고 부를 때 감격한다. 정신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자라는 것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에 대한 바람은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더 있다. 그것은 영적인 건강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물렀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영적인 건강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되고,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녀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부모를 자녀에게 주신 복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녀를 위하는 부모는 기도다.
읽을수록 의미가 더해져서 한 편의 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 한다. 칼릴 지브란이 쓴 어린아이에 대한 시다.
그대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의 아이는 아니오.
아이들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이니,
아이들이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은 아니오.
그러므로 아이들이 지금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줄 순 없다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이 머무를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이 머무를 집은 줄 순 없다오.
왜냐하면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가 꿈속에서라도 찾아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기에
그대가 아이들처럼 되려고 애쓸 수는 있지만
아이들을 그대처럼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시오.
왜냐하면 삶은 되돌아가지도 않고,
어제에 머물러 있지도 않기에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고 축복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랑하며 살도록 잠깐 맡겨주신 보석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자녀가 하나님께 마음껏 쓰임 받도록 하는 것, 이것이 부모인 우리의 책임이다. 아무튼 선물로 주신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도하는 것이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지혜롭게 해 주세요. 형통한 길로 선히 인도해 주세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칭찬받는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우리 자녀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기도하는 귀한 우리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울러 오늘 유아세례를 받을 ‘강설아’ 양이 영육 간에 강건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항상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롯하여 부모에게, 가족에게, 주변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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