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존경하라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서로 존경하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383회 작성일 08-05-18 15:17

본문

서로 존경하라.

롬12:9~13

2008. 5/18 11:00

지도자의 종류

니와 순페이가 쓴 「제왕학」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중국고사를 이용하여 현대 리더들이 가져야 할 이념과 철학, 행동지침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도자를 세 종류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형편없는 지도자다. 지도자 같지 않은 지도자, 모든 사람으로부터 두고두고 경멸을 받는 지도자다.

둘째는 두려움의 대상인 지도자다.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가 처지는 무서운 지도자, 역사에 없었어야 될 그런 지도자다.

셋째는 존경받는 지도자다. 그를 생각할 때 그 인격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훈훈해 오는 그런 지도자다.


이는 결국 존경받는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 두 종류로 요약된다. 재물을 잃은 것은 부분을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은 것은 현재를 잃은 것이지만 존경을 잃은 것은 미래를 잃어버린 것이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잘 살아보겠다고 어지간히 애를 쓰며 몸부림을 치고 있다. 배우기도 하고, 훈련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때로는 못된 짓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은 것들은 언젠가 다 내놓아야 하고, 두고 떠나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붙잡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존경이다(존경받는 부모, 스승, 지도자, 신자, 교회......).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던들 존경받지 못한 생이었다면 그의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존경이란 인간의 질적 무게를 말하는 것이다. 소유, 지식, 명예, 권력 이 모든 것이 양적이라 한다면 존경은 질적인 평가기준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 받은 인간은 존귀한 존재, 고귀한 존재다. 마땅히 존경을 받고, 존경해야하는 그러한 존재다. 심리학자 사울은 아이가 태어나서 존중을 받고 자라면 신경증, 정신병, 범죄, 폭력, 불합리한 적대적 행동, 전쟁, 가족 내의 적개심 등은 안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자란 개인들은 일하고 사랑하고 노는(play) 데에 있어 자유롭고 다음 세대를 올바르게 키워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존중(경)을 받은 사람이라야 건강한 인격,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을 존경(중)하게 된다. 동기 유형에 따라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형벌에 쫓기는 동기 유형이 있다.

항상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이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무서워하며 산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다. 전화소리가 반가운 게 아니라, 전화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컹하는 사람이 있다. 늘 피해망상에 살고, 우울증에 살고, 고독에 사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두려움의 감옥, 무서움의 감옥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사람을 반가워할 줄 모른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벌써 죽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이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이 무서워 동산 숲 속으로 숨어 버렸다(창3:8,10). 스스로 두려움의 감옥에 갇혀 버린 것이다. 이로써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죽은 것이다. 동생을 죽인 가인도 마찬가지다.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이고도 당당했다. 하나님을 향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고 항변까지 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놋 땅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에녹이란 성을 쌓고 스스로 그 성()안으로 숨어버린다(창4:16~17). 가인은 역시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형벌에 쫓기는 동기 유형의 전형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의 생명이 없고, 예수님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고, 이웃에 대하여 죽은 존재이다. 이런 사람에게 평안이나 행복은 없다. 하루 하루를 두려움, 쫓김, 불안과 공포 속에 가슴을 조이며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보상적 관계의 동기 유형이다.

내게 오는 유익이나 손익 계산이 빠른 사람이다. 그래서 악수를 해도 '이 사람과 악수해서 내게 무슨 이득이 돌아올 것인가?' 계산하고 악수를 한다. 반갑다고 하는 것 같지만 계산이 따로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모든 관계는 도구적이다. 사람을 만나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어떤 유익이 있을까, 어떻게 이용할까를 먼저 생각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주님과의 관계, 영적성장이나 성숙이 우선이 아니라 어느 교회에 나가는 것이 내 명성과 내 사업에 더 유익할까를 고려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내게 무엇을 하여 주시겠습니까?가 먼저다. 이익부터 먼저 챙기는 그러한 인격, 그러한 관계성은 무척이나 사람을 고달프게 만든다. 나아가 자기 인격을 소중한 존경을 좀먹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존경을 받지 못한다.


셋째는 존경하는 동기 유형이다.

살면서 존경하는 마음과 그 마음에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고,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존경하는 사람도, 존경하는 마음도 없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자신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주변에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남편도 존경하고, 아내도 존경하고, 심지어는 자녀도 존경하고, 주변에 있는 모두를 존경하며 살아야한다. '내 주위에는 존경할 사람이 많다. 온통 존경스러운 사람뿐이다!' 이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주변의 존경스러운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말이다. 주변이 좋아야 좋고, 주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 반면 '아무리 봐도 존경할 사람이 없다. 위를 보나 밑을 보나 다 죽일 놈뿐이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주변의 모든 사람은 존경할 것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존재들이고, 이런 사람들과 살자니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겠는가!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주변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고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자신이 심각하게 병든 것이다. 내가 행복하면 주변이 행복하게 보이고, 내가 힘들고 어려우면 주변이 온통 불행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마음, 존경하는 관계 속에 살아야 한다. 남편을 존경하며 사는 것과 억지로 사는 것, 헤어지지 못해서 사는 것과 죽지 못해 사는 것. 누구의 행복이고 누구의 불행인가? 아내다. 서로 존경하며 살면 편하고 행복하다.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혹은 '그래.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아니, 내가 그 처지라면 더 잘못했을 거야.'라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 왜냐하면 존경하니까. 그래서 믿으니까.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 아닐까?


존경할 때 또 내가 존경을 받게 된다. 존경할 때에 내 마음에 평안이 있고 신뢰가 있고 자유함이 있다. 지난 15일이 스승의 날이었는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현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다. 흔히 교육부재라는 말을 많이 한다. 교육이 부재가 아니다. 교육제도가 잘못된 것도, 교육기구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혹 잘못되었더라도 이런 것들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뿌리가 되는 존경이 없다는 것이다. 존경 없이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부모, 선생님을 존경할 줄 모르는 학생, 이러고 어떻게 교육이 되겠는가? 그리고 존경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가르치는 이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무슨 재미로 가르치겠는가. 적어도 교육은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다. 재미가 있다면 존경받는 재미인데 이것마저 없는 교육.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존경은 존경하는 마음만큼, 인간은 존경을 하는 마음만큼 성숙한다고 한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있을 때,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순간 어느 사이에 나도 그를 닮아가게 된다. 존경할 때에 내 인격이 점점 성숙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순간에 벌써 내 성숙은 멈춘다. 그래서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벌써 인격이 파탄된 사람이다.


존경하는 마음이 없고, 존경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것이다. 어지간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남편을 잘 돌보고, 또 남편을 잘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부인이 있었다.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물어보았다.

 

남편이 지금도 그렇게 술을 많이 합니까?

그렇죠. 뭐.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안하게 오늘까지 살아왔습니까.

 

그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성경에 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이 부인은 지금까지 사랑하는 남편과 산 것이 아니라 원수와 산 것이다. 남편을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사랑이지만 존경이 없는 사랑. 그것은 불행이다. 피차 못할 짓이다. 왜 사랑하는 사람을 원수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존경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것, 어느 사이에 존경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이것이 내 성품 속에 있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오늘 본문은 "사랑하라(아가페)."고 말씀하시면서 그 사랑을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가 필아델피아다.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우정)을 말한다. 둘째는 필로스톨게다. 스톨게라는 말은 혈연관계를 말한다. 이것은 혈연관계로서의 사랑(우애)을 말한다. 그리고 셋째는 티메 알레루우스다. 티메란 공경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도, 형제처럼 친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상대를 높이는 사랑이다. 존경이란 바로 이 높일 줄 아는 사랑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존경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존경을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태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서로 존경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도 아내를 존경하며, 자녀들은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도 자녀를 존경해야 한다. 모든 관계가 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존경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말씀한다. "존경하라. 서로 존경하라." 누구는 존경받고, 누구는 존경하고 그것이 아니다. 서로 존경하라. 그리고 먼저 존경하라. 내가 존경하지 않는데 어떻게 존경을 받겠는가! 한평생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높이며 살자. 그러면 모든 사람이 나를 존경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존경하라. 서로 존경하라. 그리고 먼저 존경하라. 여기에 참 평안의 길, 행복의 길, 형통의 길이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4 / 50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