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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이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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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906회 작성일 08-06-0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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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이는 힘

행1:12~14

2008. 6/1 11:00

개신교의 바람(the wind of Protestant).

15세기 이후 스페인은 해상권을 장악한 대표적인 국가였다. 그 배후에 아르마다(Armada)라는 무적함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르바다는 지금까지 전쟁에서 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무적함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이 아르마다 함대가 1588년 영국을 침입한다. 이유는 영국이 천주교를 버리자 스페인이 영국을 다시 천주교로 복귀시키기 위해 1588년 7월 27일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공격해갔던 것이다. 당시 아르마다 함대는 130척의 배와 8천명의 해군과 1만 9천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함대였다. 비록 영국이 해상국가이긴 하나 당시 영국의 해군은 무적함대에 맞설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영국은 다시 교황의 굴레와 압제 하에 놓이게 되고 신앙의 자유를 잃게 된 상황이었다. 이 때 신실한 신자들은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기도다. 그들은 도버해협을 통과한 아르마다 함대를 바라보면서 능력의 하나님께 머리 숙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통곡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이 때 기적이 일어났다. 청명한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바람 한 점 없던 바다에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무적의 아르마다 함대도 이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는 무력했다. 사실 이것은 자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결국 아르마다 함대는 이 전쟁에서 패했고, 그 후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기적적인 사건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개신교의 바람'(the wind of Protestant)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영국을 구하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변방에 있던 영국이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 배후의 힘이 기도였다. 개인이나 공동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 기도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 나온 120여 명의 사람들은 장차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고, 또한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당대의 군왕이나 영웅, 학식이 깊은 학자와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인들(outsiders)이었다. 이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서게 된 것 역시 기도다. 그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던 그곳이 교회가 되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

부활하신 후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보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감람산에서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셨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된 일이라 모두들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자리에 약 5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자기 갈 곳으로 돌아가고 제자들을 포함한 120여 명의 사람들만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라는 사람의 집 다락방에 모였다. 그들이 최초의 기독교회가 되고, 기독교 복음을 세계로 나누는 주역이 되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모이게 된 것은 주님의 당부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먼저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행1:4)고 당부하셨다. 흩어지지 말고 모이라는 말씀이다. 특히 예루살렘을 지정하신 이유는 특정한 곳(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하여 신속히 모이라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함께 함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나 일도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성사될 수가 없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모이는 것이다. 주님도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흩어지지 말고 모이라고 당부하셨고 이 말씀을 기억한 120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이는 것이다. 여기서 예배도, 기도도, 교육도, 교제와 나눔도, 섬김과 봉사도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의 이 당부의 말씀을 기억하자.


다음으로 주님은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하셨다. 이 모임의 성격과 목적, 그리고 내용에 대한 말씀이다. 이것이 없이는 일시적인 모임은 가능해도 지속적인 모임은 불가능하다. 성격도 목적도 내용도 없는 모임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주님은 무엇을 위해 모여야 할 것을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들이 모여서 기다려야 할 대상은 바로 성령이다.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을 오해한 사람들도 있었다(행1:6). 성령님을 기다려야 할 이유는 8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성령님이 임해야 능력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여서 이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 교회는 성령과 더불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공동체가 되었다.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리고 본문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다(14). 기도는 기다림의 가장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다.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돌아온 이들은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 고민하면서 어떤 조직을 만들거나 어떤 보위(保衛) 수단을 강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주님의 당부대로 모였고 그 기다림의 방법으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힘써 기도하였다. 이 작은 기도회가 사도행전의 역사, 기독교회의 역사를 이끌어갔던 힘의 원천이었고, 마가의 다락방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변화시키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의 힘이다. 본문 14절은 그들이 기도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응답받는 기도, 능력있는 기도, 문제를 해결하고 역사를 경험하게 하는 기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1. 더불어

본문 13~14절에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 그리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여인들을 포함한 120여 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 이들을 보면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출신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별과 나이도 다르고, 배움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모였다.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와 사뭇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 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비참한 실패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한 장소에 모였다. 이후 그들의 삶은 세상을 진동시키는 놀라운 일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다. 사막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공원이 있고, 그 공원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우람한 적송(赤松)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나무들이 살기 어려운 이곳에 어떻게 이런 숲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물론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러 나무가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나무가 함께 자라면서 바닥엔 늘 그늘이 생기고 습기의 증발이 억제되어 나무가 죽지 않고 숲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울창했던 밀림도 나무들이 한 그루씩 베어지면,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점차 땅이 보습(保濕)기능을 잃고 메마르게 되고, 급기야는 나무들이 말라 죽고 만다.


이것이 더불어 사는 지혜이고, 더불어 사는 생활의 중요성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함께 함이 중요하다. 함께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섬기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함께 모이는 것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다. 함께 하는 곳에 주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2:1, 3:1,4 등). 성경의 관심, 그리고 우리 주님의 관심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무엇보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과 그 공동체에 있다.


2. 마음을 같이 하여

이는 한 마음, 혹은 합심을 뜻한다. 함께 함의 조건이다. 함께 해도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면 불행을 초래한다. 얼마 전에 자유 선진당과 창조 한국당이 원 구성을 위해 공조를 선언했다. 이것을 두고 불안한 공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함께 하지만 한 마음이 되기 힘든 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의미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새 술을 헌 부대에 넣으면 부대와 술 둘 다 버린다(막2:22)는 말씀을 이 경우에도 적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함께는 한 마음이 필수다. 함께 합심해야 한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했다. 기적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기적은 그들이 마음을 같이 하였다는 것이다.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이들을 한 마음 되게 한 것이 무엇일까? 앞에서 말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주님의 당부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께서 주신 비전이다. 말씀과 비전이 그들로 합심하여 기도하게 했다.


세상에는 많은 공동체가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교회처럼 연약한 공동체도 없다. 교회는 강력한 조직도, 통제할 수 있는 강제력도, 재력이나 권력도 없다. 지위나 명예가 주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자원하여 섬기고 자신의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섬기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난 이 천년동안 한결같이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한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그 비결이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주신 비전에 있다. 우린 한 마음으로 모여야 한다.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해야 한다. 합심기도는 기도의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3. 전혀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전혀 기도에 힘썼다. 기도에만 전념하고 집중했다는 말이다. 오로지 기도에만 마음을 쏟았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태도가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깊이가 중요하다.


유다의 열한 번째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다. 그가 병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자 이사야가 와서 곧 죽을 것이니 집을 정리하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통곡을 하며 기도를 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즉시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간 연장해 주겠다고 응답하셨다(사38:1~8). 바디매오라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있었다. 매일 여리고 성 문밖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마침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그래서 눈을 뜨게 되었고 구걸하는 생활을 접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다(막10:46~52).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런데 그 심각한 문제를 기도로 해결 받았다는 점이다. 특히 이 두 사람 기도의 공통점은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응답받는 기도의 중요한 태도다(시107:9, 143:6). 본문에 나온 사람들도 간절히 10일 동안 기도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행2:1~7) 기독교회를 이루고,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게 되었다(행2:14). 


심리학자이면서 경영컨설턴트인 다니엘 골만(
D. Goleman)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1995년에 「감성지능」이란 책을 써서 EQ(Emotional Quotient)란 말을 세계적으로 유통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IQ(Intelligence Quotient)가 제일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연구를 해보니 IQ가 개인의 성공과 행복에 미치는 효과는 불과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0%는 EQ라는 것이다. 즉 머리 좋은 사람보다는 인간성이 좋은 사람,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고 자신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골만은 다시「SQ」에 관한 책을 내면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성공하는 사람의 마인드가 IQ에서 EQ로, EQ에서 SQ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SQ(Social Quotient)란 사회지수를 말한다. 사회지수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의도를 잘 파악하고,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다. 즉 더불어 사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에는 이 SQ가 높은 사람이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신앙인에게도 SQ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SQ다. 즉 영적지수(Spiritual Quotient)로서 SQ다. 신앙인들의 영적지수를 높이는 필수과목은 기도다. 빌리 그래함은 아침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보물을 여는 열쇠이고, 저녁 기도는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을 위해 닫는 자물쇠다.고 했다. 기도가 하루를 여는 열쇠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자물쇠라는 말이다.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이 되자. 무엇보다 모여서 함께,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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