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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품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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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004회 작성일 08-03-3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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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품어야 할 것들

빌2:1~4

2008. 3/30 11:00

어떤 시인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방()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마음의 방에 무엇을 담아두느냐, 그리고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쓸모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주로 거처하고 있는 방에다가 밥상을 갖다 놓으면 식당이 된다. 또 책상을 갖다놓으면 공부방이 된다. 방석을 깔면 응접실이 되고, 이불을 깔면 침실이 된다. 그런가 하면, 게임기를 들여놓으면 게임장이 되고, 화투를 치려고 담요를 깔아놓으면 도박장이 되는 것이다. 신랑/신부가 거하면 신혼 방이 되고, 아이들이 거하면 아이들 방, 머슴이 거하면 머슴방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그렇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들여놓느냐, 그리고 누구와 늘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방향과 쓸모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를 채우면 시기와 질투의 방이 되고, 미움과 다툼으로 채우면 미움과 다툼의 방이 된다. 불평과 원망을 채우면 불평과 원망의 방이 되고, 불의로 채우면 불의의 방이 된다. 이와 같은 것들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면 우리 마음은 죄악의 방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신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고 하였다. 즉 하나님을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로 우리 마음을 채우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할 것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우리의 마음에 품어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말씀한다.


신자의 특권

본문은 우리 신자의 특권과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 받은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다. 그런데 본문은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다음 네 가지 특권을 주셨다고 말한다.


첫째는 주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에게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할 말이 있다. 둘째는 위로의 특권이다. 고통과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위로를 줄 수 있는 특권이다. 셋째는 교제의 특권이다. 이는 관심과 참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넷째는 긍휼과 자비의 특권이다. 긍휼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것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자비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특권을 주셨고, 우린 이런 특권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 이 특권을 올바로 사용하기 위해선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할 것과 우리 마음에서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1.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2).

이 말씀을 요약하면 서로 눈높이를 맞추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고 하셨던 것처럼, 상대방을 나처럼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방처럼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내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 여기서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는 하나 됨이 이루어진다. 선한 것일지라도 일방적인 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든다.


자기 아내에게 감동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남편이 있었다. 늦게 믿고 보니 그동안 아내의 수고와 사랑이 새삼 고마웠다. 그래서 아내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했다. 강원도에 있는 멋진 호텔을 예약하고 둘만의 여행을 떠났다. 설악산과 그 주변을 관광하고 호텔에서 멋진 저녁식사를 하고 함께 호텔 주변을 거닐다가 객실로 왔다. 남편이 샤워를 하는 동안 아내는 베란다에서 감동에 젖어 기도를 시작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기도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이 아내의 이 모습에 너무 놀랐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래서 객실을 뛰쳐나와 차를 몰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실화다. 물론 남편의 행동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아내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은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아내가 남편의 눈높이, 즉 아직 믿음이 연약한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이다. 미움이나 분노는 사랑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막힘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반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목사님이 장애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날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말이 계속해서 더듬거려졌다. 설교 후 이 목사님은 설교를 망쳤다며 크게 상심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반대였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목사님도 자기들처럼 말을 더듬거렸다는 것 때문이다. 목사님이 자기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니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이다. 이 공감이란 단순히 상담의 원리 이상의 영적인 삶과 사역의 원리다(고전9:20~22).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한 말이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의 생각을 알고(같은 마음), 공감(같은 사랑)하게 된다. 또한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그리고 선한 의도에서 한 것이라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빠지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 마음에 같은 사랑 안에서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과 같은 입장이 되어주는데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눈높이 사랑의 원조다.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다(6~7).

2.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3上).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 제해야 할 요소들이다. 여기서 다툼이란 빗나간 경쟁심을 뜻하고, 허영은 헛된 영광을 뜻한다.


1992년 신대륙 발견 500주년이 되던 해,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19명의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여 21세기의 지구촌 문명을 분석하고 비판한 소위「경쟁의 한계: 리스본 그룹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21세기의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경쟁이다.고 했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경쟁력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무한 경쟁시대라는 미명하에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적당한 경쟁은 승부욕과 성취욕에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선의의 경쟁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고 빗나가게 된다. 이런 지나치고 빗나간 경쟁심은 사람들을 사지로 내몬다. 왜 입시철만 되면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고, 인류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올림픽에서 약물소동, 심판매수와 같은 반칙들이 쏟아져 나오는가! 지나친 빗나간 경쟁심 때문이다. 이런 경쟁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우선 경쟁은 자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지나치게 상대를 의식하게 되고, 의식하다보니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고, 비교의식 때문에 시기와 질투라고 하는 정신적인 장애에 빠진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협력해야 할 동지로 보이지 않고, 무너뜨리고 넘어서야 할 적으로만 보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인격 장애, 혹은 관계의 장애를 갖게 되는 것이다(대표적인 예가 사울왕).


다음으로 경쟁은 다수를 패배자로 만든다. 원래 경쟁이라는 라틴어의 의미는 함께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함께 추구한다.는 개념이 21세기의 무한 경쟁시대에서 승리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독점의 의미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이 경쟁심은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양산하게 되고, 결국은 다수가 실패하는 사회가 되고 만다. 그러면 사회적 불안과 불만이 커지게 되고, 이것이 극에 달할 때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난다. 이는 인류 역사가 보여준 소중한 교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빗나간 경쟁은 허영에서 온다. 허영이란 헛된 영광을 뜻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경쟁 사회란 결국 최고만이 인정을 받는 사회다. 다시 말하면 다수가 인정을 받지 못한 사회다. 여기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이것이 허영이다. 이 허영심 때문에 끊임없이 경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헛된 영광을 접고 '다수가, 모두가 성공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다.


3.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3下)

겸손은 우리 마음에 꼭 품어야 할 덕목이다. 겸손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기독교의 대표적인 덕목이다.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최고 덕목은 용기였다. 그 반대가 겸손이었는데, 겸손은 굽신거리다.는 의미로 노예의 덕목이었다. 그러므로 자유인에게 겸손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모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삶을 통해서 겸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셨고, 우리 신자가 마땅히 품어야 덕목이라고 하셨다.


사이판에 천년이 넘은 나무들이 있다고 한다. 주로 산 정상에 서식하고 있는데 대개 바람의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 한다.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땅속으로 10미터 이상 되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위로 자라기보다는 아래로 뿌리를 든든히 하고 바람의 방향으로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유연성 때문에 이 나무들이 산 정상에서 천년의 세월동안 모진 풍파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나무들이 겸손의 의미를 우리에게 정확히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겸손은 위로 올라가기보다 밑으로 내려가는 것,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에 더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것, 그리고 고집하기보다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겸손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장점이 보이고, 다른 사람이 귀하게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되고, 그 뜻에 합하게 되고, 그를 깊이 공감하게 된다. 때문에 겸손한 사람이 있는 곳엔 항상 화목과 하나 됨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에 많은 스승을 만나게 되고,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수용하게 되니 항상 성장하게 된다. 성경은 이 겸손을 우리 주님의 마음이라(마11:28~29)고 말씀한다. 그래서 5절 이하에서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한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교회다. 그런데 허영심으로 인한 빗나간 경쟁심에 사로잡힌 몇 사람 때문에 교회가 같은 마음,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마음을 모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겸손은 없고 자기 자랑만 무성했다.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특권이 빛을 바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품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소중히 받자! 그리하여 주님이 주신 소중한 특권을 올바로 사용하는 신자,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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