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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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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272회 작성일 08-06-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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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야 산다.

창11:1~9

2008. 6/29 11:00

통()하지 않으면 통()한다.

흥부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합창처럼 들리는데 어디선가 밥 냄새가 솔솔 난다.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픈 흥부, 그 밥 냄새를 따라 코를 킁킁거리며 찾아 나선다. 마침 형수가 허리를 굽혀 밥을 퍼 담고 있었다. 인기척을 해도 형수가 알아채지 못하자 흥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마른기침을 하고 나서 나지막하게 한마디 한다.

   형수님, 저 흥분돼(데)요.

   형수님, 저 흥분돼(데)요.

그 말에 당황한 형수, 돌아보더니 밥 푸던 주걱으로 흥부의 귀싸대기를 냅다 쳤다.


흥부가 형수에게 주걱으로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이유가 뭘까? 그것은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가 통하지 않아서 생긴다. 자신과 통하지 않고, 가족과 통하지 않고, 이웃과 통하지 않고, 동료나 상사와도 통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국가간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불행을 겪고 있다. 통하면 행복(亨通)하지만 통하지 않으면 고통(苦痛)이다.


길은 통해야 한다. 내 안의 기와 혈이 가는 길도 원활하게 통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의 비결이다. 가족끼리도 통해야 하고, 이웃과도, 동료나 상사와도 통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다. 위정자와 백성도 서로 통해야 하고, 나라와 나라도 서로 통해야 한다. 이 때 행복하고 건강한 나라, 세계가 된다. 모든 병(육체의 병, 관계의 병, 국가의 병)은 통하지 않는데서 생긴 것이다. 신앙생활도 주님과 통해야 하고, 말씀과 통해야 하고, 성령과 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병들게 된다. 그러므로 통해야 산다. 숨이 통해야 살고, 말이 통해야 살고, 관계가 통해야 산다. 사는 것은 통하는 것이고, 막히는 것은 죽는 것이다.


바벨탑의 의미

요즈음 우리 사회에 소통(communication)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라가 총체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백성들은 소통을 외치면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정부 역시 소통을 말하면서 이를 공권력으로 막아서고....... 어디 하나 시원하게 통하는 게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들리는 것은 한숨이고 불평이고 원망이고 비난이다. 또한 갈등과 대립, 고통만 증폭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성경에 나온 바벨탑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다.


바벨탑은 노아홍수 후 인간들이 하나님을 반역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노아홍수 후 이 땅에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노아의 가족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세상에는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지역은 더 이상 사람들이 모여살기에 좁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동을 결심하고 남쪽 메소포타미아의 골짜기로 옮겨 가서 바벨 땅의 평원(시날 평지)에서 살게 되었다. 이 시날 평지는 옛 사람들이 200배 이상의 수확이 가능하다고 칭찬했던 극히 비옥한 땅이었다. 시날 땅에 정착한지 얼마 후에 그들은 한 성과 한 탑을 쌓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이다. 성경은 이 바벨탑 사건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1. 인간 의도의 죄악성을 보여준다(4).

벽돌을 만든 것은 당시의 문화적인 혁명이었고, 그들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벽돌을 구워 집을 짓고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항아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일은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힘을 모아 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벨탑이다. 바벨탑은 당시 문명과 문화의 상징이다.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들의 의도다. 그들이 이 신기술을 이용하여 거대한 탑을 쌓은 의도가 문제인 것이다. 성경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의도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3~4)


그들은 벽돌로 탑을 쌓기로 했다. 단순히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탑을 쌓은 이유는 하늘까지 닿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반항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에덴에서 뱀이 인간에게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창3:5)며 유혹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첫 번째 이유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반역이다.


둘째로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다. 우리도 한 번 하나님처럼 유명해지자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되었던 벽돌 한 장 한 장마다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자기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간절했나를 잘 보여준다.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사람들의 다음 단계는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다. 과거의 지배자들의 무덤이었던 피라미드나 고인돌과 같은 기념물들의 공통점이 자기과시 목적이다. 살아서는 자기를 신처럼 떠받들게 하고 죽어서는 자기 이름을 기억하도록 엄청난 상징물을 남긴 것이다. 경건한 신자라면 자기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항상 기억하는 것과 모든 일에서 자기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셋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시날 땅에 왔을 때 발견한 구호가 있다. 그것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보호를 위하여 집단과 세력을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이 온 지면에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벨탑을 쌓은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가 될 수 없고, 자신들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 없다는 색각, 그들 스스로 자신을 지키겠다는 생각의 반영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하나님의 창조명령과 인간의 본분을 무시하고 바벨탑을 쌓은 것이다. 홍수 후에도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셨다(창9:7).


2. 소통불능의 원인을 보여준다(7).

바벨탑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들의 악한 의도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도전하고,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보호를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있다. 인간들의 이와 같은 악한 의도와 행위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께 강림하셨고(5), 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7), 더 이상 탑을 쌓지 못하도록 막고(8), 온 지면으로 그들을 흩어 버리셨다(9). 한 마디로 소통불능 상태로 만들어 인간들의 악한 의도를 실현할 수 없게 만드셨다는 말씀이다.


우린 여기서 소통불능의 근본적인 원인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죄다. 죄의 결과는 단절이다. 소통의 단절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창1:26~27). 즉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그 교제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소통 단절은 사람들과의 단절로 이어진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통하지 않는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통하라.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과 소통이다. 신통(神通)하면 인통(人通)하고, 인통하면 물통(物通)한다고 했다(3요:2).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잘되면 다른 관계 역시 잘된다는 말씀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소통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말씀이다. 무엇이든 하나님과 통하면 형통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회개다. 죄 문제의 해결이다. 성경은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참조/사1:15~17,시66:18 등)고 말씀한다. 죄에 대한 해결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죄는 무엇인가? 본문은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비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교만과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소통의 비결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1요3:5).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에 대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소통, 이웃과의 소통의 길을 여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그리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엡3:16), 하나님께로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엡3:18). 즉 하나님과 소통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 상징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기도다. 서로 간에 의사를 소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대화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고, 영혼의 대화라고 한다. 호흡이 막히거나 끊기면 우리의 육체가 죽거나 병들고, 대화가 막히면 우리의 관계가 힘들게 된 것처럼 신자는 기도가 막히면 신앙이 병들거나 힘들어 진다. 건강한 기도생활은 건강한 신앙생활과 비례한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겹친다할지라도 기도의 줄을 놓고 있지 않는 한 소망이 있다. 시간이 문제이지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는 한 희망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또한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요5:14~15). 반면에 모든 것들이 계획대로 잘되고 있을지라도 기도를 쉬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위기다. 기도하면 만사형통(萬事亨通), 기도쉬면 만사불통(萬事不通)!


사도행전 2장에 나온 성령강림사건의 인상적인 내용 중 하나가 바벨탑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언어의 회복이다(8). 성령 안에서 소통에 대한 회복의 비전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여(요16:8) 회개로 이끌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하며(고전12:3), 기도를 도우시는 분(롬8:26~27)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회개의 삶과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항상 통하는 삶이 되자! 하나님과의 소통이 잘되는 신자, 교회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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