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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지수(thanksgiving Quot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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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602회 작성일 08-11-1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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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지수(thanksgiving Quotient)

롬8:28

2008. 11/16 11:00

옆 사람에게 칭찬의 말을 하고, 그 칭찬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해 보자. 서로의 표정이 환하게 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감사를 표현하면서 얼굴을 찡그린 사람은 없다. 아니 찡그린 얼굴로는 감사를 표현할 수가 없다. 감사를 할 때는 다들 얼굴을 활짝 펴게 된다. 그렇다. 감사하면 얼굴이 환하게 펴진 것처럼, 감사하면 우리의 생활도, 인생도, 관계도, 하는 모든 일도 활짝 펴지게 될 것이다(우리 교회에 대한 감사의 표현).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11.4)에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선거가 있기 얼마 전에 오바마, 제2의 듀카키스되나라는 기사가 나왔다. 1988년 미국 대선 때, 민주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M. Dukakis)가 크게 우세하였으나 막판에 뒤집혀 패배한 일을 두고, 오바마 역시 막판에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런 징후가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대선의 최대 이슈는 사형폐지론이었고, 듀카키스는 사형제도 폐지 찬성을 중요한 선거 전략으로 삼고,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다. 그 쇼의 진행자는 유명한 버나드 쇼(B. Shaw)였다. 진행자가 듀카키스 후보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 하신다죠?

참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사형제도에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평생을 사형제도에 반대해 왔습니다.

이 장면을 본 많은 유권자들이 듀카키스에게 매우 실망을 하였다. 아무튼 이 토론회 때문에 그의 지지율이 하룻밤 사이에 49%에서 43%로 떨어졌고, 결국 선거에서도 패배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것은 듀카키스 후보의 문제만이 아니다. 누구든지 남 이야기는 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이야기일 때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입장이나 처지에 서보지 않고 쉽게 말하고 평가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지금까지 두 번, 오늘까지 세 번째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감사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 우린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따져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쳐다보고 있는 남편이라면,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이 점점 더 깊어가는 상황이라면, 평생을 장애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술만 먹으면 짐승으로 돌변한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아내라면, 이 상황에 대해서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주님, 감사합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대답해 보라!


말씀과 현실, 결국은 믿음의 문제이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다. 항상 기뻐하라.’ ‘핍박을 즐거워하고 위해서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인간적으로 이 말씀들은 현실성이 없다. 이상론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지키지도 못할,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주시는 무지막지한 독재자가 아니라는 것. 나의 연약함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나에게 복을 주시고자 주신 말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과 현실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차이를 극복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제가 앞 설교들에서 감사는 마음(mind)의 문제, 태도(attitude)의 문제, 관점(perspective)의 문제라고 했는데, 우리의 마음과 태도와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믿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이런 믿음을 가지면 말씀과 현실의 차이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합력하여 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바울의 신앙고백이요, 그의 인생관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지식이나 경험, 훈련이나 학습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에서 온다(마16:17). 사람들은 좋은 일에도 방해되는 일이 많다는 뜻을 지닌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을 자주한다. 좋은 일에도 방해되는 일이 많다면 좋지 않은 일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못 살겠다, 힘들다, 죽겠다, 희망이 없다, 안된다.와 같은 부정적인 말들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는 좋은 일이든 좋지 않는 일이든 항상 그 결과는 좋다(바울의 고백처럼)이다. 때문에 어떤 상황, 환경, 사건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감사지수는 믿음지수에 비례한다. 믿음이 충만할수록 감사도 충만하게 된다.


섭리적인 신앙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과 같은 믿음을 섭리적 믿음이라고 한다. 섭리(provideo)하나님의 뜻에 의해 나의 삶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존재해 왔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섭리적 신앙이란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계획되고 결정된다(마10:29)는 고백, 나는 우연한 삶의 자리에서 특정한 행위를 했는데 결국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삶의 행위가 하나님에 의해 행하여졌다(왕상22:34)는 고백, 그래서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런 섭리적인 신앙, 오직 하나님의 뜻에 초점이 맞추어진 절대 신앙에는 인간적인 염려나 걱정, 불평이나 원망이 자리할 틈이 없다. 모두가 은혜요, 감사요, 기쁨이다. 자꾸 우리의 삶이 이런 신앙에서 비껴가기에 말씀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 사이로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불평의 씨, 원망의 씨, 불신의 씨를 뿌려놓게 된다. 


섭리적인 신앙의 모델, 요셉.

성경에서 이런 섭리적인 신앙의 가장 좋은 모범이 요셉이다(창37:~50:).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의 지나온 삶의 여정은 불행그 자체였다. 네 명의 어머니와 열 명의 짐승같은 이복형들. 요셉은 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상인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 감옥살이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칼을 갈 법도한데,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 충실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혹독한 기근으로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만나게 되었다. 형들은 출세한 요셉 앞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전전긍긍하였고, 요셉은 형들을 무조건 용서하였다. 요셉이 조건없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이 그의 믿음, 즉 섭리적인 믿음이다. 요셉은 자기 앞에서 무서워 떨고 있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8).

당신들은 나를 해하여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요셉의 이 말들은 섭리적인 신앙의 진수(眞髓)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은 형들에 의해 팔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고백. 그것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 일을 형들의 손을 빌려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고백이다. 그리고 형들은 그가 미워서, 그를 해할 목적으로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형들에게 복수가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감사로 꽃 피우고, 우리의 삶을 감사로 물들게 하는 비결이다.


믿음으로 감사지수를 높여라.

염려는 감사의 적(敵)이다. 염려의 구름이 앞을 막아서면 우리의 감사지수는 뚝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 염려는 믿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무엇을 먹을까? 먹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마6:30)이라고 하셨다. 결국 믿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때문에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 없는 것에 집중하여 염려하고 걱정하며, 나아가서는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요셉처럼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은 모두가 주님의 뜻이요, 은혜라고 하는 강한 섭리적인 믿음을 가지면 염려는 사라지고 감사지수는 높아진다. 그래서 절대감사,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 생활 속에서 감사의 기적을 경험하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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