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매듭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아름다운 매듭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123회 작성일 08-12-28 15:50

본문

 아름다운 매듭

딤후4:6~18

2008. 12/28 11:00

명품인생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브라질 출신의 마라톤 선수 리마(Vanderlei C. Lima)를 기억할 것이다. 우승을 거의 확신하며 달리다가 결승선 약 6㎞지점에서 어느 관중이 레이스에 뛰어들어 그를 넘어뜨린 바람에 결국 1등을 놓치고 3등을 한 사람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환희 웃으면서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이런 그의 모습을 본 관중들은 그를 향하여 기립박수를 보냈다. 시상대에서도 금메달을 딴 동료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고, 기자회견에서는 멋진 소감을 남겼다. 


메달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위대한 올림픽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나를 밀친 관중도 용서한다.


돌발사태로 인하여 금메달은 놓쳤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정말 금메달감이었다. 그래서 1등보다 3등인 그가 더 주목을 받아 화제가 되었고, 올림픽정신을 몸소 실천한 멋진 선수로 칭찬을 받았다. 그는 우리에게 마무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또 하나 사건을 이야기하자면,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독일과 이탈리아의 4강 경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연장전 종료 1분전까지 승부가 나질 않았다. 다들 승부차기를 생각하였고, 승부차기는 독일우세를 점쳤다. 거미 손 올리버 칸(O. Kahn)이 골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 1분을 남겨두고 이탈리아가 골을 성공시키면서 독일선수들과 관중들을 아연케 만들었다. 그래서 축구에서 시작 5분과 종료 5분이 중요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 사건이 되었다.


축구뿐만이 아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시작이 반(well begun is half done)이라지만 인생은 시작보다 마지막이 더 중요하다. 마무리를 잘해야 명품인생이 된다. 첫 인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지막 뒷모습이다. 길지 않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출발은 좋았는데, 마지막 뒷모습 때문에 부정적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인상은 별로였는데, 아름다운 뒷모습 때문에 지금까지 아름답게 기억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 잘못된 시작은 중간에 수정이 가능하지만 잘못된 마무리는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편지, 마지막 부분이다. 사랑하는 동역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준 사적인 부탁과 당부이다(9).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복음전파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주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동시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이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6). 여기서 관제는 구약시대 때 제사를 드리는 방법 중 하나로 짐승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쏟아 붙는 제사방법이다. 이는 바울 자신이 주님을 위해 어떠한 죽음을 죽음 것인지를 말해준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몇 가지를 준비하고 있다.


1. 만남(9)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서식한다는 우추프라 카치아라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면 시들어서 죽어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결벽증이 심한 식물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식물을 바라보기만 할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 수가 없단다. 그런데 어느 식물학자가 이 식물에 대해 연구한 결과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식물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면 바로 시들어서 죽지만 처음 손길을 준 사람이 계속적으로 보살펴 주면 죽지 않고 잘 자라서 예쁜 꽃을 피운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식물은 사람의 손길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스쳐가듯 만져주고 떠나 가버린, 처음 관심을 가져준 사람의 손길을 기억하고 그 손길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다 죽어갔던 것이다. 혹자는 첫 사랑을 잊지 못하는 식물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결벽증이 있고, 까다롭고 별난 사람일수록 사람을 그리워하고 친구를 필요로 한다. 바울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평생을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섬기고 복음전파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았다. 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과감하게 버렸다. 정말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고독감과 아울러 사람을 그리워하는 애틋함이 절절이 묻어나고 있다. 역시 바울도 사람이고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나와 함께 있느니라.......”(11).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16).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


그래서 누구보다 자기를 잘 알고 만나면 위로가 될 수 있는 디모데를 속히 오라고 당부한 것이다. 디모데를 통하여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나 만난다고 다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나면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역시 나의 존재가 위로가 되는 사람, 그래서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이 되자.


2. 반성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자기 행동에 대한 반성과 평가능력이다. 다른 동물의 세계에 변화나 발전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성이나 평가능력이 없기에 창조이후 항상 반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도 반성이 없으면 변화나 발전이 없는 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사람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반성에 민감하게 열려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사역과 관계의 측면에서 반성을 한다. 사역(7~8)의 경우는 후회없는 인생이고(7), 또한 기대가 되는 인생(8)이라고 평가하였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평가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16).


이는 바울 자신의 인간관계 실패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지금 바울 곁에 누가
(11)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떠난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나는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을 믿기 때문이고(15), 다른 하나는 깊은 자기 성찰 때문이다. 허물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허물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겐 자기보호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하면 먼저 자신을 챙기고, 변명거리를 찾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변명보다는 자신의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바울의 높은 인격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논어에 이런 멋진 말이 나온다.


군자지과야(君子之過也)는 여일월지식언(如日月之食焉)이라.

과야(過也)에 인개견지(人皆見之)하고, 경야(更也)인개앙지(人皆仰之)니라.


지난해에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가 자기기인’(自欺欺人)이었다. 자기를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인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 불감증을 꼬집은 것이다. 그런데 금년엔 호질기의(護疾忌醫)가 선정되었다.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문제가 있어도 다른 사람의 충고를 꺼려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 다 자기반성이 없는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자기반성이 깊은 사람은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되고, 문제를 드러내놓고 여러 사람의 조언을 구하게 된다. 반성은 자기 발전의 첫 걸음이다. 신자는 날마다 주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잘된 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잘못된 점은 속히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도 남을 비판하고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있다고 원망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다. 인격의 미성숙의 표이다.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기 전에 자신을 본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비판보다는 칭찬과 격려를 한다. 비판보다는 자기반성에 민감한 사람이 되자.


3. 용서를 통한 화해

관계에 있어서 바울에게 가장 마음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라는 제자다. 바울의 선교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바울은 마가의 삼촌 바나바의 도움으로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되었고, 또한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바나바와 함께 선교여행을 시작했다. 그 때 마가도 동행을 했다. 그런데 힘든 여행 탓인지 마가가 중도에 포기했다. 이 일로 선교일정에 많은 차질이 있었다. 이렇게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2차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 마가가 또 동행하겠다고 했다. 이 때 바울이 강력 반대하여, 결국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다툼이 생겼고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물론 이 때 바울이 마가를 선교여행에서 제외시킨 것은 마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보다 선교사역 때문이었다. 주님의 일을 좀 더 바르고 곧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때문에 그를 만나 화해를 하고 또 그를 격려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하고 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  


이 한해를 마감하면서 꼭 만나야 할 사람,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은 없는가? 화해해야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있다. 이 화해는 용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헬라어로 용서는 풀어 주다, 놓아 주다, 던져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심각한 상처나 아픔을 준 사람이나 사건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고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이나 사건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묶여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이나 기쁨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를 하면 그 사건으로부터,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란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기보다 자기를 위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긴 여행이었지만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바울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즉 아름다운 결말을 확신한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8).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2008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 2008년은 내게 어떤 해였는지,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해였는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이것이 바울의 생의 결론이다. 지금 주님 앞에 선다면 나 역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꼭 만나야 할 사람,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은 없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4 / 48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