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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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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162회 작성일 08-11-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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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눅17:1~6

2008. 11/23 11:00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mask syndrome).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친절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화가 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생기는 마음의 병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의학적인 용어로는 우울한 속마음을 감추고 항상 웃는다고 해서 가면성(假面性) 우울증으로도 불린다. 하회탈처럼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절망으로 울고 있는 모습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나 언제나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일을 해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병증이다. 우리나라 20~30대 성인 남녀 10명 중 7명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에 빠진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그 수치가 이렇게 높게 나온 것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우리 문화와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체면은 허위의식을 낳는다. 그러므로 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은 체면이나 허위의식과 관련이 깊다.


이런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으로부터 우리 신자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체면과 허위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소위 하는 신자들이다. 믿음이 좋은 척, 경건하고 거룩한 척, 기도하는 척, 열심히 섬기고 헌신하는 척, 은혜 받은 척, 기뻐하는 척, 감사하는 척, 겸손한 척, 아는 척, 있는 척. 이렇게 척하는 것은 연기이지 신앙이 아니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요란하지만 내용은 없다. 심령의 기쁨, 감사, 평안, 충만이 없고, 무엇보다도 삶의 변화와 신앙의 열매가 없다. 말 그대로 껍데기뿐이다. 이런 사람에게 신앙은 자신의 허위의식을 벗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마스크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 물론 허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날마다 애쓰고 있지만 내 자신도 여기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외쳤던 귀신에게 붙잡혀 고생하는 아이를 고쳐달라고 주님을 찾아온 한 아버지의 기도(막9:24)가 나의 기도,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믿음이 없다. 그래서 여전히 체면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마음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지난 주일에 감사의 측면에서 주님의 말씀과 우리가 처한 현실의 차이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본문에서 제자들은 실족과 용서의 측면에서 주님의 말씀과 그들이 처한 현실의 차이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본문설명 생략). 그리고 결론은 우리와 같이 믿음에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라고 말했다. 그런데 주님은 엉뚱하게 겨자씨 비유(6)로 제자들의 요청에 응답하셨다.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한 주님의 믿음에 대한 말씀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한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는 말씀이다. 즉 믿음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다. 제자들의 이 말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1~4)을 실천할만한 믿음은 못되어도 자신들에게 상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더 큰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은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라는 것이며, 바른 질의 믿음을 가지면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6)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하기보다,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 생각해 봄으로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믿음의 단순성이다.

맥스 루케이도(M. Lucado) 목사의 책에 나온 이야기이다(약간 바꾸었음). 한 목사님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교회를 방문하러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배가 어느 섬에 하루 동안 정박했다. 그는 배에서 내려 해변을 따라 산책하다가 마침 그물을 수선하고 있던 세 명의 어부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신자였다. 이런 낯선 곳에서 신자를 만난 것이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다.

과연 이들은 주기도문을 알까?

사실 어부들은 주기도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목사님이 물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어부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세 사람, 당신(하나님)도 세 분,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목사님은 이들의 원시적인 기도 방식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날 하루 종일 거기서 이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다. 가련한 어부들은 배우려는 의욕이 넘쳤다. 떠나기 전까지, 이들은 주기도문을 다 외웠다. 그래서 그는 뿌듯한 가슴을 안고 그 섬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오는 길에, 그가 탔던 배가 그 섬에 다시 들리게 되었다. 그는 갑판에 나와서, 점점 가까워지는 섬의 전경을 바라보며 지난번에 어부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준 것을 즐거운 듯 회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아직 멀리 보이는 섬에서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그것은 자기가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었던 세 명의 어부였다. 이들이 배를 향해 물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자 모든 승객과 선원들이 갑판으로 쏟아져 나왔다. 배에 가까이 이르자 어부들이 소리쳤다.

목사님, 당신을 만나러 급하게 오는 길입니다! 죄송하지만 우리가 그 주기도문을 까먹었거든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안 나요. 그러니 다시 가르쳐 주세요!

이 광경 앞에서 목사님은 매우 겸손해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형제님들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세요. 옛날처럼 우리는 세 사람, 당신도 세 분,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그렇게 계속 기도드리세요. 그래도 됩니다!


이는 믿음의 단순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믿음은 이 어부들처럼 주기도문도 모르지만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수식이나 이론이나 사색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주님께서 서라하면 서는 것이고, 가라하면 가는 것, 먹어라하면 먹고, 먹지 말라하면 먹지 않는 것이다(마8:5~9).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 중 하나인 겨자씨, 그 겨자씨의 한 알에 믿음을 비유한 것은 믿음의 단순성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어느 분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헬라철학을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 빠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철학화, 추상화 된 신앙, 그래서 너무 복잡하고 사변적으로 변질된 신앙에 대한 경계이다. 우리는 믿음이란 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고 한 파스칼(B. Pascal)의 말을 깊이 생각해야한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모습이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바램이시다. 천재 과학자 아이작 뉴턴(I. Newton)은 말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 동안 자기가 쌓아놓은 과학적 업적은 물론 자신의 이름까지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주님이 자신을 위하여 죽으신 사실만은 분명하게 기억했다고 한다.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2. 믿음의 역동성이다.

주님은 믿음을 비유하시는데, 모래알이나 작은 먼지와 같은 무생물에 비유하시지 않고 씨앗에 비유하셨다. 그것도 씨앗들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겨자씨의 크기는 깨알의 1/6에 해당될 만큼 작다. 그런데 이것이 자라면 크게는 3~4m까지 되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여 살 정도가 된다. 겨자씨는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생명력과 역동성의 상징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믿음의 생명력과 역동성, 나아가서 믿음의 영향력을 강조하신 것이다. 믿음은 생명이다. 생명은 변화와 성장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준다. 연약한 새싹이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바위틈을 비집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힘이고, 특징이다. 믿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변화를 일으키고, 역사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제자들은 믿음을 생명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재산처럼 늘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해 달라는 믿음의 양을 구하게 된 것이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고, 전시용 박제(剝製)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고, 넘쳐흐르는 물과 같다. 믿음은 전이가 되고, 소성(蘇醒)시키는 힘이 있고, 살리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회복의 역사, 치료의 역사, 살리는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아무리 크고 단단한 바위라도 자기 스스로 단 1㎜의 거리도 움직일 수도 없고, 자랄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바위틈에서 살고 있는 연약하고 작은 개미는 자기가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갈 수가 있고, 그곳에서 자란 풀은 그 바위를 덮을 만큼 자란다. 이것이 생명의 특징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역동적인 믿음을 가지면 불가능한 상황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6).


비즈니스 상담가 데일 카네기(D. Carnegie)는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없다(lack), 잃어버렸다(loss), 한계가 있다(limit)는 이 세 가지(3L)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개 이 말은 패배자들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고민과 고통이 바로 이 ‘3L’ 때문이다. 결핍과 상실, 그리고 한계는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가시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도전하게 하고 이런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상황을 변화시켜서 이것들을 극복하게 만든다. 믿음의 역사를 보면 결핍과 상실, 한계와 싸워서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이와 같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제자들처럼 믿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믿음을 양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을 늘리는 데만 관심이 있고, 믿음의 말을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을 많이 쌓아두었다고 하여 배가 부르지 않다. 먹어야 한다. 믿음으로 살 때 믿음의 역사,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고, 믿음의 사람이 된다.  아무리 큰 산이라도, 큰 건물이라도 그것을 태우는데 성냥개비 하나면 충분하다. 고여있는 물은 아무리 많아도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적은 양이라도 흐르는 물이라야 물레방아를 돌릴 수가 있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믿음은 양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때때로 믿음은 허황된 것처럼 들리고, 보이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 믿음을 따라 살면 반드시 그것의 실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살아서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희망이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비야 씨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아프가니스탄 어느 마을에서 한 농부를 만나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씨앗을 달라고 했다. 흉년 때문에 종자까지 다 먹어서 씨를 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정은 다른 마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돕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몇 마을만 씨앗을 주고 왔다. 그런데 그 해도 역시 비가 오지 않아 작물이 자랄 수가 없어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얼마 후 그곳을 방문한 그녀는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흉년으로 굶주린 것은 마찬가진데, 그리고 씨앗을 뿌렸지만 가뭄 때문에 씨앗이 나지도 않았는데, 씨앗을 뿌려놓은 마을 사람들이 씨앗을 뿌리지 않은 마을 사람들보다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비야 씨는 이 상황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였다.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희망이 그들을 살린 것이다.


믿음이 이와 같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본다. 믿음이란 환경보다, 상황보다,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10년 전 IMF시대 때, 어떤 사람들은 ‘I am fall’이라고 외쳤으나 믿음의 사람들은 ‘I am full’이라고 외쳤다. 주님은 그 믿음대로 우리를 채워주셨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절망을 이야기한다. 우린 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아야 하고,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하는 단순한 믿음, 살아 있는 역동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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