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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으로 살아가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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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715회 작성일 08-11-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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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으로 살아가는 존재

벧전1:3-9

2008. 11/30 11:00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勝者)다.

훌륭한 지도자 뒤에는 좋은 참모가 있다. 지도자가 아무리 탁월해도 참모의 지략이 부족하면 성공할 수 없다.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의 지혜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를 잘 알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탁월한 참모로 장자방(張子房, 본명: 장량)을 꼽는다. 장자방이란 말은 한 사람의 이름을 넘어서 참모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훌륭한 참모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대는 내 장자방이다.

장자방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나라를 세우는 위업을 이루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유방이 천하를 제패한 후 다른 공신들은 높은 지위와 많은 땅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나중에는 유방의 경계대상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자방은 재물이나 명예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속세를 떠나 아무 해도 당하지 않았다. 참으로 통찰력과 판단이 탁월한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장자방이 유방을 도와 초(楚)나라 항우를 파멸시키고 천하를 얻을 때 사용한 중요한 작전에 이런 것이 있었다. 초나라와 싸움을 벌이다가 어려우면 달아나는 것. 그리고 다시 힘을 모아서 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다보니 항우의 군대는 연전연승을 하면서도 이긴 것 같지가 않았고, 승리를 해도 속이 시원한 게 아니라 답답하고 거북했다. 그러면서 항우와 초나라 군사들은 지쳐갔다. 반면에 한나라 군사는 연전연패 하면서도 낙심하지 않았다. 장자방이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99번 패해도 마지막 한번 결정적일 때 승리하면 된다. 한나라 군사들은 계속해서 지면서도 장자방의 말대로 마지막 결정적인 싸움에서 한번만 이기면 된다는 희망 속에 낙심하지 않고 힘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유방은 마지막 한판에서 항우를 파멸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99번 패해도 마지막 한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 된다. 그렇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다. 계속해서 져도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한번만 이기면 된다는 태도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쓰러지지 않는다. 몇 번 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최후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힘이고, 이런 사람이 성공한다.


소망에 대한 상징들.

소망에 대한 상징이 여럿 있다. 소망의 상징 중 하나가 이다. 바람이 심해서 파도가 높다 할지라도 든든한 닻이 바다 속 깊이 박혀 있으면, 배는 풍파에 밀려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때때로 여러 가지 풍랑을 만난다. 하지만 아무리 풍파가 심해도 소망이 있으면 그 풍파에 우리의 작은 배가 밀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망의 다른 한 가지 상징은 이다. 별은 문학작품 등에 자주 등장하는 소망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다. 나침반이 없을 때에는 별을 보고 방향을 살폈다. 특히 밤에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나 사막 같은 곳을 가는 사람에게 별은 중요한 길잡이였다. 우리가 인생행로에도 어두운 밤이 있다. 환난의 밤, 질병의 밤, 절망의 밤, 슬픔의 밤, 고독의 밤을 지날 때가 있다. 그 때 소망이 있으면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인생길을 바로 갈 수 있다.

 

또 한 가지 상징은 날개이다. 어떤 새가 나무 가지에 앉았다. 그런데 그 나무 가지가 썩어서 부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새는 썩은 가지와 함께 땅으로 추락하지 않는다.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는 날개를 펴서 공중으로 날아 더 튼튼한 가지위에 가서 앉는다. 살다보면 내가 의지하고 믿었던 그 나무 가지가 꺾일 때가 있다. 의지했던 건강이 무너지거나 사업의 실패로 돈이 없어질 때, 권력의 가지가 꺾여 무참히 무너질 때, 의지하던 부모형제, 혹은 친구가 떠날 때가 있다(사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세상의 것들은 썩은 나무 가지와 같다). 이런 때라도 소망이 있으면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날개를 펴서 더욱 비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생활에서 소망은 절실하다. 소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소망은 우리 인생의 이고, 우리 인생길을 비추는 이고, 다시 비상(飛上)하게 하는 날개이기 때문이다.


산 소망

오늘 본문은 이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본문에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온다. 산 소망이라는 말이다. 산 소망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산 소망은 살려주는(살게 하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소망이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다. 소망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살고자 하는 의욕을 주고 용기를 주고 이유를 준다. 그래서 산 소망은 살려주는(살게 하는) 소망인 것이다(지난 주 한비야 씨 이야기 상기). 소망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개의 경우 능력이 없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서 실패한다. 그래서 성공의 비결로 가장 많이 듣는 답이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함은 이런 이유에서다. 소망이 있으면 어떤 환경도 상황도 역경도 질병도 넘어설 수가 있다.


둘째, 산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소망은 이생의 유익뿐만 아니라 영생의 유익도 준다. 산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 죽어 없어지는 소망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는 소망, 곧 영생의 소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산 소망은 살려주는 소망이면서 살아있는 소망이다. 단지 세상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사업을 성공하게 해주는 소망이 아니라 영생을 얻게 해주는 소망인 것이다. 이런 영생의 소망을 가지면 영생으로 가는 길이 험하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 너무 험해서 포기하고 싶다가도 그 길을 다 간 후에 받을 영생의 축복을 생각하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의 소망은 우리로 신앙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오히려 죽어가던 신앙까지 살려준다. 그래서 산 소망인 것이다.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산 소망이 영생의 소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perish) 않고 더럽지(spoil) 않고 쇠하지(fade)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3~4).


그러므로 산 소망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유업)인데, 썩지도 손상되지도 시들지도 않는 것이다. 신자의 삶이란 이것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비록 99번 패하더라도 마지막 한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 된다는 장자방의 말처럼, 이 땅에서의 실패에 주눅들지 않고 마지막 결정적인 승리를 향해 나아가야한다. 유방은 수없이 패했지만 마지막 결정적인 싸움에서 이기고는 모든 기쁨과 명예와 축복을 받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세상 고생 모두 잊고 완전한 행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야한다.


셋째, 산 소망은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영생의 소망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성취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산 소망이 아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이고 신기루다. 그러나 산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이 점이 세상의 소망과 주님 안에서 우리 신자들이 간직한 소망의 결정적인 차이다. 어느 작가는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없는 것이다.고 했다. 세상의 희망에 대한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세상의 희망은 불확실한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희망을 말하면서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부터 유행했던 대중가요 〈희망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같도다.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희망가가 아니다. 절망에 가까운 〈허무가〉라 함이 더 좋을 것 같다. 세상의 무엇(부귀와 명예)이 희망인줄 알고 쫓았는데, 아니더라는 것. 그래서 세상만사가 꿈같이 헛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 소망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썩지도 더럽지도 쇠하지도 않는 것이다(4). 없는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지나 존재하기 때문에 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흔히 꿈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산 소망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긴 하지만 거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본문은 말씀한다. 6절에서는 여러 가지(manifold) 시험을 당하리라고 했고, 7절에서 이 시험들이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요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5).


우리는 이런 시험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감당할 힘도 능력도 지혜도 없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시련으로 인하여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다(7).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잠시 근심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다(6). 이는 신앙생활의 양면성을 잘 반영해주는 말씀이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사람이기에 시험 앞에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기에, 그리고 시험의 결과를 알기에 힘들지만 어렵지만 고통스럽지만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분이시요, 그것을 보호하여 주시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산 소망이 되는 것이다.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존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인 존재), 호모 파베르(Homo Faber, 만드는 존재),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존재) 등. 독일의 사회철학자 에릭 프롬(E. Fromm)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정의했다. 즉 사람은 희망으로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은 소망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소망이 없다면 살았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 T. Cicero)‘While there's life, there's hope'(삶이 있는 한 소망도 있다.)고 했다. 삶에 대한 긍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나는 ‘While there's hope, there's life'(소망이 있는 한 삶도 있다.)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단테(A. Dante)는 그의 「신곡」에 나온 지옥의 문 위에 여기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희망을 버릴지니라.고 적어놓았다. 희망(소망)이 없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는 뜻이다. 소망이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망은 배의 닻과 같고, 저녁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고, 새의 날개와 같다. 그래서 어떤 시련의 풍랑에도 부서지지 않고, 환난의 밤에도 방황하지 않고, 의지하는 것이 무너져도 추락하지 않고 비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보호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산 소망이다.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절기인 대강절 첫 주일이다. 이 소망의 절기에 주님이 주신 산 소망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절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소망을 주는 사람,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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